좌파와 우파는 서로 다른 틀로 사회 문제들을 살핀다. 그런 틀의 다름은 역사에 대한 태도에서 두드러진다.

우파는 현상을 역사적 맥락에서 살핀다. 그래서 그들은 문제적 현상도 그것이 나오게 된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런 현상을 직접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비용이 많이 든다고 지적한다.

좌파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어떤 이상적 청사진과 비교한다. 그들은 우리 사회가 가난한 중세적 사회에서 풍요로운 현대적 사회로 빠르게 발전해와서 부족하거나 추한 점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에 안 드는 부분들을 도려내려 한다.

이런 차이는 우연이 아니다. 우파는 사회가 느닷없이 생긴 것이 아니라 역사를 지녔고 끊임없이 진화한다고 여긴다. 사회가 그렇게 ‘경로종속적(path-dependent)’이므로, 그들은 과정을 살펴서 현상을 평가한다.

반면에 좌파의 틀은 목적론이다. 사회가 환경에 맞춰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가 예언한 이상적 상태를 향해 나아간다고 보는 것이다. 그들에겐 과정이 아니라 최종적 결과가 중요하다.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진 뒤, 마르크스를 드러내놓고 따르는 사람들은 드물지만, 마르크스에 심취했던 사람들은 여전히 그의 세계관을 틀로 삼아 세상을 본다.

이런 세계관의 대립은 사회적 평등에서 잘 드러난다. 좌파는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재산과 소득을 갖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우파는 기회의 평등이 이뤄진 뒤에 나오는 차이는 자연스럽다고 여긴다.

두 세계관을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사와 과정을 아예 무시하고 최종 결과만으로 판단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레고리 맨큐의 지적대로, 최종 결과만을 고려하는 것이 옳다면, 열심히 공부한 학생들과 게으른 학생들이 같은 학점을 받아야 한다.

이런 패턴은 기업 지배구조 논쟁에서 다시 선명하게 드러났다. 좌파가 제기한 문제는 대기업집단의 의사결정에서 나오는 불평등이다. 그들은 “단 몇 %의 지분만을 가진 총수가 실질적으로 재벌 전부를 소유한다”고 비판한다. 현상만을 보면 틀린 얘기는 아니다. 그래서 ‘경제 민주화’라는 구호 아래 나오는 기업 지배구조 비판에 많은 시민들이 공감한다.

그러나 기업이 자라난 역사를 살피면 얘기는 달라진다. 어떤 재화가 생산되려면, 먼저 소유권이 확립돼야 한다. 자신이 생산한 것을 자신이 소유한다는 확신이 없으면 누구도 생산에 착수하지 않는다.

창업자는 자신이 세우려는 기업이 자기 것이 되리라 믿고서 기업을 세운다. 그리고 그 기업을 자신이 소유하려고 애쓴다. 기업이 자라나면 외부 투자가 늘어나므로, 창업자의 지분은 점점 줄어든다. 당연히 창업자는 줄어든 지분에도 불구하고 경영권을 유지하는 방안을 찾는다. 모든 성공적 지배구조는 이 조건을 충족시킨다. 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지배구조는 이내 사라진다.

이렇게 보면 우리 대기업집단 총수들의 지분이 아주 적다는 사실은 창업자나 그의 후계자들이 적절한 지배구조를 찾아냈고 덕분에 투자가 꾸준히 이뤄졌다는 것을 가리킨다. 투자자들은 창업자를 믿고서 자발적으로 투자했고 불만이 있는 투자자들은 주식을 팔고 떠났다. 그런 과정의 어디에 무슨 문제가 있는가. 기업의 지배구조는 정치체제가 아니며, 기업 총수의 경영권 확보는 전제정치가 아니다.

그렇게 기업이 자라나면서 소비자들은 삶이 윤택해졌고 종업원들은 일자리를 얻었고 정부는 세금을 점점 많이 거두었다. 사회가 기업들에 무엇을 더 요구할 수 있겠는가.

시장경제에서 기업 형태는 환경에 맞게 진화한다. 그래서 실재하는 기업 지배구조는 우리 사회의 도덕, 법, 지식, 문화적 풍토로 이뤄진 환경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나은 지배구조에 아주 가까울 터다. 그것을 바꾸어서 더 나은 것이 나올 가능성은 생각보다 훨씬 작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지금 실존하는 기업 지배구조를 바꾸려는 시도는 정의롭지도 현명하지도 못하다.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한다. 모든 것들은 역사를 지녔다는 사실을.

< 복거일 소설가·경제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