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치 자료 뒤져 증여세 1000억 물렸다
작년 초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 조사3과 박병수 사무관(사진)은 한 회사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주 A씨와 자식들이 세금을 거의 내지 않고 회사의 지분을 골고루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난관에 부딪쳤다. 거래 과정에서 무기명채권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무기명채권을 사고파는 방식으로 3자에게 증여하면 세금 추징이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박 사무관과 이철재 조사관, 이경선 조사관은 포기하지 않았다. 6개월간의 조사 끝에 탈세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1015억원을 추징하는 데 성공했다. 작년 공무원들이 노력해 더 거둬들인 재정수입 중 이들 세 명이 기여한 금액이 21.5%에 달했다. 기획재정부는 최근 예산성과금심사위원회를 열어 이들에게 1500만원을 성과금으로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30년 동안 진행된 증여 포착

무기명채권 조사가 어려운 이유는 금융실명제 때문이다. 금융실명제법(부칙 제9조)이 ‘무기명채권 소지인에 대해서는 자금의 출처 등을 조사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자금 흐름을 파악하기 힘든 게 문제였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무기명채권 거래와 관련된 사람들의 거래내역을 모두 조사했다. A씨가 주식을 자식들에게 증여하기까지 걸린 30여년간의 관련 거래를 모두 역추적한 것이다.

조사를 통해 밝혀진 A씨 일가 변칙 증여 과정은 이렇다. 30여년 전 A씨는 본인 소유 주식을 회사 임원과 지인들에게 맡겼다. 차명으로 보유(명의신탁)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자녀가 대주주인 회사를 통해 이 주식을 조금씩 저가에 사들였다. A씨는 이것만으로는 안심을 할 수 없었다. 회사 제품을 판매하는 대리점 주인들에게 무기명채권을 나눠준 뒤 이 채권을 판 돈으로 명의신탁된 주식을 사게 했다. 명의신탁을 반복함으로써 자금 출처와 주식의 실소유주가 누구인지 알아차리기 힘들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하지만 박 사무관 등은 30년 동안의 주식거래 흐름을 모두 살펴보고 조금이라도 관계된 사람들의 주식거래까지 샅샅이 훑었다.

6개월간의 조사 끝에 명의신탁을 이용해 변칙 증여한 사실을 하나하나 밝혀냈다. 그리고 A씨 및 자녀들의 재산변동상황을 정리·분석함으로써 무기명채권을 사주 일가가 사용한 사실을 확인했다. 완강하게 부인하던 A씨 일가는 결국 변칙적인 방법으로 주식을 증여했다고 시인했다.

30년치 자료 뒤져 증여세 1000억 물렸다

◆세무대 출신 베테랑 3인방

국세청 동료들은 박 사무관이 세무공무원 생활 29년 중 조사업무만 18년을 해 온 베테랑이었기 때문에 이를 밝혀낼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정재수 서울지방국세청 조사3과장은 “박 사무관은 워낙 꼼꼼한데다 끈질기게 사건을 추적하는 근성이 있어 변칙적인 세금 탈루건을 잘 잡아낸다”고 말했다. 세무대를 졸업하고 1983년 세무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박 사무관은 조사 1국, 2국, 4국을 모두 거쳤다. 이철재 조사관과 이경선 조사관 역시 세무대 출신으로 각각 8년, 4년의 세무조사 경력을 갖고 있다.

재정부는 예산성과금위원회에서 이들을 포함, 재정 수입을 늘리거나 예산을 줄인 공무원 185명과 3개 과에 예산성과금 2억5900만원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지난해 공무원들의 노력으로 늘어난 재정수입은 4714억원, 예산절약액은 545억원이었다.

임원기 기자 wonk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