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운전기사 리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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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
고집 세고 자존심 강한 유대인 할머니 데이지가 교통사고를 낸 뒤 마지못해 흑인 운전기사 호크를 고용한다. 사사건건 트집 잡히고 툭 하면 무시당하는데도 호크는 유머와 인내로 데이지를 보살핀다. 결국 두 사람은 신분과 피부색깔을 넘어 20여년 동안 우정을 나눈다. 고용주와 운전기사의 관계를 푸근하고 정감있게 그린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다.
하지만 현실에선 이들의 관계가 해피엔딩인 경우는 드물다. 마음으로 통하기보다는 ‘이상한 주종관계’로 맺어지기 쉬운 탓이다. 영국의 ‘쇼퍼(chauffeur) 스쿨’, 즉 고용운전기사 양성소에서는 이런 덕목을 가르친다고 한다. 고개를 뒷좌석으로 돌리지 말라, 불러도 백미러로만 본다, 주인을 방해하지 않는다, 주인의 거동을 모른 척 한다…. 아무리 그래도 운전기사는 고용주의 일상을 속속들이 파악하기 마련이다. 종일 동선(動線)이 같은 데다 온갖 심부름과 궂은 일까지 맡다 보니 모를래야 모를 수도 없다.
그들의 정보력은 조선시대에도 알아줬다. 하마평(下馬評)이란 말이 나온 게 그 증거다. 주로 고관대작이었을 주인이 일 보러 간 사이 마부들끼리 하마비(下馬碑) 부근에 모여 나눈 인사전망이 의외로 정확했던 거다. 주인의 언행을 이리저리 맞춰보면 누가 뜨는지, 실세가 누구인지 추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주 만나는 사람이나 뻔질나게 드나드는 기생집까지 뚜르르 꿰고 있었을 게다. 옛 소련에선 주요 인사들의 운전기사를 아예 KGB에서 파견했다고 한다.
요즘 새누리당을 강타하고 있는 공천헌금 사건의 제보자 정동근 씨도 현영희 의원의 운전기사이자 비서였다. 제보 내용이 구체적인 데다 ‘루이비통 가방’ 같은 물증이 확인됨에 따라 신빙성이 높아졌다는 게 검찰 판단이다.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과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 구속으로 번진 파이시티 수사의 단초를 제공한 것도 브로커 이동율 씨의 운전기사였다. 이상득 전 의원 역시 김찬경 미래저축은행 회장이 운전기사의 제보로 밀항에 실패하는 바람에 구속됐다. 한몫 잡아보려는 욕심, 거액의 불법자금이 오가는 것을 보며 느꼈을 상실감, 고용주에 대한 불만과 서운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렇다 보니 운전기사가 뒷좌석의 대화나 통화 내용을 듣지 못하도록 방음 장치를 한 차도 나온 모양이다. 만나는 사람을 숨기려고 몇 ㎞ 전에 내려 택시로 갈아 타기도 한단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해법일 수는 없다. 주변을 투명하게 정리하지 않는 한 운전기사가 아니라도 누군가가 제보할 가능성은 상존하기 때문이다. 배은망덕이라고 통탄할 일도 아니다. 비리가 없어야 배신도 없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
하지만 현실에선 이들의 관계가 해피엔딩인 경우는 드물다. 마음으로 통하기보다는 ‘이상한 주종관계’로 맺어지기 쉬운 탓이다. 영국의 ‘쇼퍼(chauffeur) 스쿨’, 즉 고용운전기사 양성소에서는 이런 덕목을 가르친다고 한다. 고개를 뒷좌석으로 돌리지 말라, 불러도 백미러로만 본다, 주인을 방해하지 않는다, 주인의 거동을 모른 척 한다…. 아무리 그래도 운전기사는 고용주의 일상을 속속들이 파악하기 마련이다. 종일 동선(動線)이 같은 데다 온갖 심부름과 궂은 일까지 맡다 보니 모를래야 모를 수도 없다.
그들의 정보력은 조선시대에도 알아줬다. 하마평(下馬評)이란 말이 나온 게 그 증거다. 주로 고관대작이었을 주인이 일 보러 간 사이 마부들끼리 하마비(下馬碑) 부근에 모여 나눈 인사전망이 의외로 정확했던 거다. 주인의 언행을 이리저리 맞춰보면 누가 뜨는지, 실세가 누구인지 추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주 만나는 사람이나 뻔질나게 드나드는 기생집까지 뚜르르 꿰고 있었을 게다. 옛 소련에선 주요 인사들의 운전기사를 아예 KGB에서 파견했다고 한다.
요즘 새누리당을 강타하고 있는 공천헌금 사건의 제보자 정동근 씨도 현영희 의원의 운전기사이자 비서였다. 제보 내용이 구체적인 데다 ‘루이비통 가방’ 같은 물증이 확인됨에 따라 신빙성이 높아졌다는 게 검찰 판단이다.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과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 구속으로 번진 파이시티 수사의 단초를 제공한 것도 브로커 이동율 씨의 운전기사였다. 이상득 전 의원 역시 김찬경 미래저축은행 회장이 운전기사의 제보로 밀항에 실패하는 바람에 구속됐다. 한몫 잡아보려는 욕심, 거액의 불법자금이 오가는 것을 보며 느꼈을 상실감, 고용주에 대한 불만과 서운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렇다 보니 운전기사가 뒷좌석의 대화나 통화 내용을 듣지 못하도록 방음 장치를 한 차도 나온 모양이다. 만나는 사람을 숨기려고 몇 ㎞ 전에 내려 택시로 갈아 타기도 한단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해법일 수는 없다. 주변을 투명하게 정리하지 않는 한 운전기사가 아니라도 누군가가 제보할 가능성은 상존하기 때문이다. 배은망덕이라고 통탄할 일도 아니다. 비리가 없어야 배신도 없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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