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류의 일생'으로 본 옷값의 비밀
상품번호 ‘R042PH’는 작년 여름 경기도 한 공단에서 태어났다. 고급스러운 광택의 가벼운 패딩 점퍼다. 30대 직장 여성을 공략하는 프리미엄 브랜드답게 42만8000원의 정가가 매겨져 백화점으로 직행했다. 하지만 ‘R042PH’는 지금 서울 문정동의 한 아울렛매장에 처박혀 있다. ‘한정 초특가’ 7만9000원으로 가격표를 바꿔달았지만 손님들은 “오리털도 아닌데 너무 비싸다”며 눈길을 주지 않는다. ‘R042PH’와 같은 ‘재고’들은 의류업계에 부지기수로 널려 있다. 국내 의류시장의 가격책정 관행과 유통이 불황에 유난히 취약한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노스페이스의 ‘굴욕’

'의류의 일생'으로 본 옷값의 비밀
2일 산업연구원이 발표한 ‘의류 재고시장 현황과 시사점’에 따르면 5월 기준 의류 재고는 지난해 말 대비 29.7%나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0년 1.2%, 2011년 15.3%의 증가율(전년 대비)을 나타냈던 것을 감안하면 가파르게 재고가 쌓이고 있다는 얘기다.

또 지난해 의류 생산액 대비 재고 비율은 20.0%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제조업 평균 재고비율(9.0%)의 두 배를 넘어선다. 박훈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불황기를 극복할 수 있는 의류업계의 시장분석 능력이 떨어지는 데다 소비자들이 유행에 워낙 민감해 재고가 확대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R042PH’를 만든 ‘R’사 디자이너는 재작년에 이어 작년 겨울에도 ‘슬림 패딩 점퍼’가 히트칠 것으로 봤다. 하지만 비슷비슷한 점퍼가 시장에 넘쳐나면서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한 의류업체 관계자는 “아웃도어 의류업체들은 지난해 말 슬림 패딩제품을 대량 생산에 나섰다가 참담한 실패를 맛봤다”며 “‘노세일’을 자칭하던 노스페이스도 30% 할인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정가판매는 30%에 불과

국내 의류 10벌 가운데 6~7벌은 할인 판매의 운명을 타고난다. 산업연구원 분석 결과 백화점이나 대리점 등 1차 유통시장에서 정가로 판매되는 제품은 30%가량에 불과하다. 비싼 출고가격이 문제다.

‘R042PH’의 경우도 초기 가격은 터무니없이 비쌌다. 백화점의 의류 수수료율이 판매가격의 35~38%에 달하는 데다 제품 기획과 제작, 소재 조달, 위탁 납품 등 복잡한 제작구조가 원가를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박 연구위원은 “통상 유명 브랜드업체들은 옷을 세 벌 만들어 한 벌 판매한다는 가정 아래 세 벌 생산비용을 한 벌에 전가시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가격 구조는 재고량을 늘리고, 재고 보관과 관리 비용이 다시 원가에 포함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정가에 팔리지 않은 60~70%는 아울렛과 홈쇼핑 등 2차 유통시장으로 넘어가 30~90% 가격이 할인된다. 여기서도 팔리지 않은 제품들은 ‘땡처리’ 대상이다. ‘박스떼기’로 넘어가거나 공단 근처 소각장에서 태워지게 된다.

정가는 터무니없이 비싸고, 재고는 넘쳐나는 구조에 정부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국내 의류시장 규모는 40조원(작년 기준)에 달해 물가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높다. 기획재정부는 재고시장을 활성화해 옷 가격과 물가를 동시에 잡는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 할인매장 명소가 된 서울 가산디지털단지의 예처럼 지방산업단지에 아울렛 매장을 유치할 수 있도록 지원책을 마련한다는 방침이다.

김유미/민지혜 기자 warmfron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