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더위가 한창이라 연일 폭염주의보가 내린다. 그렇잖아도 번잡한 홍진(紅塵) 속에서 폭염이라니. 이 일 저 일에다 글빚에 쪼들려 남들 다 가는 피서도 못 간 채 책상머리에 앉았노라면 가슴이 답답하고 맥이 빠진다.

고인(古人)들의 피서를 찾아 책장을 뒤적이다가 월송정 숲 속에 대나무 다락을 덩그렇게 만들어 놓고 그 위에서 유유자적하는 피서 모습 하나를 찾았다. 이 시원한 광경을 상상해 보고, 더위가 침노할 수 없는 사통팔달의 시원한 누각을 마음속에 지으라는 가르침까지 들어보자.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1539~1609)가 임진왜란 때 경상도 평해(平海)로 귀양 가 있을 때 지은 《아계유고(鵝溪遺)》중 ‘죽붕기(竹棚記)’다.

‘갑오년 여름 내가 달촌(達村)에서 화오촌(花塢村)의 전에 우거하던 집으로 이주했는데, 집이 비좁고 낮아 드나들 때마다 늘 천장에 머리를 부딪치곤 했다. 때는 복더위가 한창이라 마치 뜨거운 화로 속에 있는 것 같았고, 모기와 파리까지 귀찮게 달려들어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이웃집에 사는 이우열이란 사람과 피서할 방도를 강구한 끝에 월송정 숲 속에 높은 다락을 매달기로 했다.’

이산해는 월송정 숲 속에 다락을 매다는 과정을 이렇게 설명한다.

‘다락은 기둥이 모두 넷인데 셋은 그곳에 서 있는 소나무를 그대로 이용하고 하나는 나무를 따로 세웠으며, 가로목 역시 넷을 걸친 다음 그 위에는 대나무를 깔았다. 그 너비는 수십 명이 앉을 만하고 사방에는 모두 대나무를 엮어 난간을 둘렀으니, 떨어질 위험을 방비하기 위해서다.’

다락을 만들고는 술자리를 베푼다. ‘다락이 이루어지자 이웃 노인들과 함께 보리로 빚은 술을 마시며 축하했다. 이로부터 식사며 기거, 좌와(坐臥), 잠자리를 날마다 여기서 했는데 언제나 솔바람이 서늘하게 불고 그 시원한 기운이 뼛속에 스며들어 아무리 드센 더위도 기승을 부리지 못하고 모기와 파리 따위도 감히 근접하지 못했다.’

그렇게 흥겹게 여름날을 다락에서 보내던 어느 날 꿈을 꾼다. 꿈에 푸른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

“그대는 한갓 이 다락이 좋은 줄만 알고 천상의 사람이 내려다보면 진흙탕과 같은 줄은 알지 못하니 이는 참으로 작은 것에 얽매어 큰 것에 어둡기 때문이다. (…) 이 누각은 마음으로 애써 설계할 것도 없고, 좋은 목수의 솜씨를 기다리지도 않고 잠깐 사이에 세울 수 있는데 등림(登臨)하는 즐거움이 이 다락에 비길 바가 아니며, 소박하고 청절함은 말할 것도 없고 인사(人事)의 득실과 영욕, 희비와 우락(憂樂) 또한 모두 태허공 가운데 구름과 안개처럼 흩어져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이러한 누각을 짓기를 도모하지 않고 한갓 이 다락에서 즐거워하고 있는가.”

평해의 월송정은 지금도 우거진 솔숲이 좋고 탁 트인 해변 경관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곳이다. 이 솔숲 속에 수십 명이 앉을 만한 큰 대나무 다락을 높이 매달아 놓고 그 위에서 피서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그렇지만 이 다락에 누워 있어도 이산해의 마음은 후련하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꿈속에서 푸른 옷 노인을 등장시킨다. 푸른 옷 노인은 월송정 신령일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사실은 이산해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또 다른 자신일 것이다. 이산해는 시원하기 그지없는 월송정 숲 속에서 뜨거운 복더위와 파리, 모기는 피할 수 있었으나 현실의 번민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마음속 자기만의 자유세계를 찾아서 들어앉음으로써 암담한 현실의 중압감을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리라.

답답한 연구실 안에 들어앉아 저 푸른 동해 바닷가 월송정, 짙푸른 솔숲의 대나무 다락에 누운 나를 생각하고, 그래도 짜증이 나고 가슴이 답답하면 좁아지는 마음을 애써 열고 그 속에 덩그런 누각을 지어서 들어앉아 볼 수밖에 없을 듯하다.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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