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신천역 부근 먹자골목. 저녁이 되면 번쩍이는 네온사인과 함께 수많은 젊은이들로 불야성을 이루는 곳이다. 이곳에 벤텍스(사장 고경찬·52)라는 업체가 있다. 종업원이 41명에 불과한 중소기업이다. 업종도 화려하지 않다. 섬유원단업체다. 많은 사람이 무심코 지나친다.

하지만 먼곳에서 이곳을 찾아오는 외국인들이 있다. 섬유를 담당하는 해외 바이어들이다.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한 일본 바이어들을 비롯해 미국 캐나다 독일 프랑스 영국 바이어들도 줄지어 방문한다. 미쓰비시 관계자들은 이곳을 수십 차례 찾기도 했다. 도대체 섬유 분야의 선진국 바이어들이 왜 이런 한국의 뒷골목까지 오는 것일까.

이들은 이 동네 닭갈비집이나 베트남쌀국수집에서 끼니를 때우며 수입 상담을 벌인다. 8월에는 연간 매출액이 수십억달러에 달하는 세계적인 스포츠의류업체 최고경영자도 방문하기로 예정돼 있다. 여름휴가조차 마다하고 상담을 위해 이곳까지 찾아오는 것이다.

이 회사 연구소에 들어서면 각종 실험장비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원단이 땀을 얼마나 빨리 외부로 배출하는지 보여주는 장치에서부터 옷감을 물에 적신 뒤 온도의 변화를 보여주는 장비, 밝은 전구로부터 오는 열에 옷감의 온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나타내는 장비 등이다. 특이한 것은 대부분 실험장비들을 이 회사가 직접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 회사는 섬유원단 업체이지만 폴리에스터나 면 등 일반 원단을 만드는 업체가 아니다. 건물벽에 붙은 수많은 표창장과 특허증이 이 회사가 특수원단을 만든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도대체 무슨 원단업체가 특허를 82건(등록 62건, 출원 20건)이나 갖고 있는 것일까.

이 회사는 기능성 섬유원단을 만든다. 예컨대 ‘드라이 존’은 땀이 1초 만에 외부로 배출되는 원단이다. 고경찬 벤텍스 사장은 “이 원단은 물을 밀어내는 원사와 물과 친한 원사를 3차원 입체 구조로 설계한 뒤 특수가공기술을 접목시켜 만들었다”며 “땀이 흡수와 동시에 1초 만에 마르는 쾌속건조기능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노스페이스 뉴발란스 GAP 휠라 리복 데쌍트 아식스 와코르 등이 이 원단을 사간다.

‘아이스필’은 차가운 성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원단이다. 이 제품은 나이키 뉴발란스 컬럼비아 살레와 등으로 수출된다. ‘메가 히트’라는 제품도 있다. 고 사장은 “땀을 열에너지로 전환하는 극한보온섬유로 아디다스 데쌍트 GAP 등으로 내보낸다”고 설명했다.

최근엔 땀을 흘리면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원단도 개발했다. 수분을 흡수하면 팽창하는 정도가 서로 다른 원단을 적절한 무늬로 배치해 땀을 흡수한 원단이 몸에서 분리되는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를 이 회사는 ‘스마트 섬유’라고 이름붙였다. 마치 스스로 생각해서 변신하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고 사장은 “이 제품은 차세대 전략제품이 될 것”이라며 “몇몇 메이저 스포츠의류업체와 수출 상담중”이라고 설명했다.

이 회사가 적은 인원으로 약 1000만달러의 수출을 포함해 지난해 282억원의 매출을 올릴 수 있는 것은 연구·개발(R&D)과 마케팅 중심으로 조직을 갖췄고, 생산은 협력업체를 통해 하기 때문이다. 거래처는 스포츠의류 업계의 거인들이다. 고 사장은 “세계적인 스포츠의류업체와는 직접 협상한다”고 말했다. 그들의 협력업체와 상담을 벌이는 게 아니라는 의미다.

제주도 출신의 고 사장은 연구하는 기업인이다. 그는 고요한 밤중에 연구에 몰입하는 경우가 많다. 새벽에 어떤 아이디어가 머리를 스치면 미친 듯이 메모한다. 그는 “때로는 밤중에만 섬유 관련 아이디어를 100페이지 이상 적어 내려간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이 중 몇몇은 학회지에 논문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성균관대 공대에서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공은 섬유공학이다. 박사학위는 유기소재공학으로 받았다. 하지만 이에 머물지 않는다. 올해 초 중앙대 대학원 융합의약과학과 박사 학위과정에 입학해 피부과학을 연구하고 있다. “섬유를 좀더 깊이 연구하려면 피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고 사장은 설명했다. 피부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새로운 영역인 스킨케어, 뷰티케어 및 메디컬용 섬유소재 개발에 나서고 있다. 예컨대 지방억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약물전달용 원단 등 다양한 신제품을 만들었거나 연구 중이다.

그의 신제품 개발은 책상에서의 연구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그는 대학재학 중 남들이 피서를 갈 때 부산의 재래시장으로 내려가 장돌뱅이 행상을 하기도 했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괴나리 봇짐을 지고 양말과 간이샤워기를 팔았다.

때로는 시외버스에 올라타서 운전기사에게 90도로 정중하게 인사한 뒤 “이 제품으로 말씀드리면…”으로 시작되는 레퍼토리를 읊기도 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고객들이 무엇을 찾는지를 골똘히 생각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뜨거운 여름날 좌판에서 물건을 파는 상인들이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생각해 샤워기 등 장사 아이템으로 연결시킨 것이다.

대학 졸업 후엔 코오롱에 입사해 신소재 개발기획팀장을 역임하며 새로운 제품 개발에 나서기도 했다. 이런 도전정신이 창업으로 이어졌고 수많은 기능성 원단을 개발하는 계기가 됐다. 이 회사의 기술력을 인정해 일본 미쓰비시가 이 회사에 투자하기도 했었다.

그는 “섬유산업을 한물 간 산업쯤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며 “섬유야말로 한 가지 기발한 원단을 개발하면 수십억달러의 매출을 올릴 수도 있는 블루오션”이라고 주장했다. 고 사장은 “사람이 스마트폰 없이는 살 수 있지만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듯이 옷도 마찬가지”라며 “그런 면에서 섬유는 인류 역사와 뿌리를 같이하는 산업이고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이어질 산업”이라고 강조했다.

"경영 철학이요?…더불어 사는 거죠"

고경찬 벤텍스 사장의 경영철학은 ‘더불어 사는 삶’이다. 이는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 직원과 더불어 사는 삶이다. 그는 열심히 일한 직원에겐 푸짐한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이 회사에는 억대 연봉의 팀장이 있다. 몇몇 직원의 보유 주식 가치는 수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뛰는 만큼 보상이 있다는 점을 확실히 보여준다. 그러다보니 유능한 인재들이 몰려온다.

둘째, 거래처와 더불어 사는 삶이다. 그는 거래처 사장들에게 단순히 원단만 팔지 않는다. 수시로 비즈니스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몇몇 업체는 고 사장의 조언을 받아들여 새로운 기능성의류 생산에 나섰고 안정적인 사업 궤도에 올라섰다.

셋째, 미래의 섬유산업을 짊어질 대학생들과 더불어 사는 삶이다. 고 사장의 섬유에 대한 애착은 남다르다. 그런데 대부분의 대학이 ‘섬유공학과’를 신소재공학과 등 애매모호한 이름으로 바꾸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고 사장은 “현재 4년제 대학 중 섬유공학과라는 이름을 고수하고 있는 곳은 10개 정도”라고 말했다. 그가 올해 초 섬유산업연합회와 약정을 맺고 매년 3000만원씩 10년간 3억원의 장학금을 섬유공학과 재학생에게 주기로 한 것도 이 산업의 발전을 염원하기 때문이다.

김낙훈 중기전문기자 n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