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해외기업들을 거침없이 사들이고 있다. 올해 해외 인수·합병(M&A) 규모는 사상 최고였던 작년 850억달러(약 96조원)를 훌쩍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1980년대 미국 록펠러빌딩(미쓰비시)이나 영화사 컬럼비아(소니) 등을 인수할 때를 연상시킨다는 전문가도 있다.

그러나 당시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평가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과거 실패를 거치면서 전략적으로 발전한 M&A가 일본의 새로운 성장동력이 되고 있다”고 23일 분석했다. 1980년대에는 이름값만 높은 회사들을 가리지 않고 사들였다. 결과는 손실로 이어졌다. 그러나 최근에는 철저한 시장조사와 시너지효과를 고려해 조심스럽게 사들이고 있다. FT는 “다른 전략을 통해 실패 확률을 크게 낮췄다”고 설명했다.
日기업 스마트 M&A "폭식 NO·알짜 YES"
덴츠가 영국 광고회사 에기스를 인수한 것이 대표적이다. 덴츠는 과거 세계 3위 광고회사 퍼블리시스 지분 15%를 인수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지분을 팔았다. 이를 교훈 삼아 이번에는 에기스 지분 100%를 인수했다. 다른 주주나 경영진과의 충돌 가능성을 완전히 없앤 것이다. 쇼이치 나카모토 덴츠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안정적인 경영권을 확보하는 게 최근 일본 M&A의 트렌드”라고 설명했다. 이름값에 의존하지 않고 철저한 사전조사를 하는 것도 과거와 달라진 점이다. 재팬타바코는 영국 담배회사 갈라허를 인수하기 위해 3년간이나 시장조사를 했다.

신중하지만 의사결정은 빨라졌다. 미국 곡물유통회사 가빌론이 매물로 나오자 마루베니상사 경영진은 복잡한 의사결정 과정을 건너뛴 채 56억달러를 쏟아붓기로 결정했다. FT는 “보수적인 일본 기업문화에선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고 평가했다. 좋은 매물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처럼 일본 기업들이 해외 M&A에 열을 올리는 것은 더이상 내수시장에 의존할 수 없다는 절박함 때문이다. FT에 따르면 일본 인구는 매년 80만명 이상이 줄어들고 있다. 2060년엔 지난해보다 30% 이상 감소한 8600만명이 된다. 일본 최대 온라인 쇼핑몰 라쿠텐의 히로시 마키타니 최고경영자(CEO)는 “세계화 말고는 살 길이 없다”고 토로했다.

지난해 일본을 강타한 대지진도 M&A 열풍에 불을 지폈다. 부품회사들이 문을 닫자 일본 경제 전체가 마비됐고, 내수경기가 얼어붙어 해외시장을 확보해놓지 않은 일본 기업들은 직격탄을 맞았다. 노무라증권 미국 M&A 담당인 조너선 로너는 “시장과 공급처를 다변화해야 한다는 긴박감이 일본 기업들 사이에 퍼졌다”고 설명했다. 자금시장 여건도 우호적이다. 세계적 경기침체로 매물 가격이 싸졌다. 또 엔화가치가 높아져 같은 매물도 더 낮은 가격에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컨설팅업체 제프리스의 나오미 핑크 일본전략가는 “7년 전부터 일본 기업들은 수출보다 해외투자로 더 많은 돈을 벌고 있다”며 “일본 기업들이 M&A에서 활로를 찾겠다는 의지가 분명해 당분간 이런 트렌드는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남윤선 기자 inkling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