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에 대해 가장 많이 알려진 말은 무엇일까. 아마도 ‘권력무상(權力無常)’이라는 말이 아닐까. 꽃이 열흘 이상 피지 못한다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 그렇고 권력이 10년 이상 못 간다는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말도 그렇다. 요즈음 대통령 측근과 친인척의 권력비리가 만천하에 밝혀지면서 감옥에 가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기고 보니 ‘권불오년((權不五年)’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권력을 누렸던 사람들의 무상함과 허무함이 물씬 풍기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하기야 생각해보면 무상한 것이 어찌 권력뿐이겠는가. 가는 세월도 무상하고 모아 논 재물도 무상하다. 열심히 재물을 모아도 사기꾼 한번 잘못 만나면 만사 끝이다. 심지어 계절의 정취조차 무상하다. 무더운 여름 다음에 가을이 다가오는 이치를 보라. 천하의 만물이 무성하게 자라다가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을 보면 계절이 얼마나 무상한지 알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런지 고대 그리스의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가 없다”고 했다. 만사가 변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무상한 것이 권력의 특징일까. 그렇다고만은 볼 수 없다. 때로는 권력이 그 찬란한 위용을 자랑할 때도 있는 법이다. 권력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여 권력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은 권력이 줄 수 있는 것이 많은 까닭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주위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권력은 또 높은 직위도 주고 부귀영화도 준다. 심지어 그 전에는 깔보던 사람조차 권력을 가지게 되면 아첨의 말을 늘어놓고 잘 봐달라며 돈을 주기도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필요한 곳에 압력도 행사할 수 있고 그동안 자신을 무시하고 제대로 대접을 해주지 않았던 사람들에 대해 통쾌하게 복수해줄 수도 있다.

이처럼 권력이 요술방망이와 같으니 과연 권력 앞에서, 또 권력을 가진 권력자 앞에서 초연할 수 있겠는가. 쓰레기통에서 살았던 그리스의 철학자인 디오게네스는 자신을 찾아온 알렉산더대왕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을 만큼 무관심했다. 알렉산더가 초조해하자 디오게네스는 청이 있다고 하면서 “햇볕을 가리지 말아 달라”고 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일화가 2000년 이상 내려온 것도 디오게네스처럼 권력을 무덤덤하게 대하는 사람들이 천연기념물처럼 희소하고 드물기 때문이리라.

확실히 권력은 특권이다. 상대방에게 “무엇을 원하는가”하고 물을 수 있고 또 원하는 바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처럼 권력이 줄 수 있는 것은 많으나 줄 수 없는 게 딱 한 가지 있다. 양심이 그것이다. 권력을 갖게 된 사람이 부귀영화를 얻을 수 있을지언정 양심을 얻을 수는 없다. 그러기에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수 있는’ 양심은 권력을 갖기 전에 반드시 갖추어 놓아야 할 필수적 심성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양심을 챙겨야 할 이유다. 권력자로서 하는 행동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지 수시로 돌아봐야 한다. 또 자신이 갖게 된 권력은 남을 위한 봉사용일 뿐 특권을 누리고 거드름을 피우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권력이 양심을 잃을 때 권력은 그 권력을 가진 주인에게 복수를 하고 징벌을 내린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사회에서는 특히 민주화 이후 대통령들이 줄줄이 친인척비리를 피해가지 못했다. 아니 예방주사조차 맞을 생각을 못한 것이다. 그래서 면역기능이 생길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권력이 오로지 부귀영화를 약속하는 특권에 불과할 뿐 양심과 동행해야 하는 엄숙한 현상임을 깨닫지 못한 탓이다. 이제 이번 대통령 친인척비리를 계기로 권력이 부귀영화를 줄지언정 양심은 주지 못한다는 점을 새삼 기억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양심을 갖지 않은 권력자에 대해 가차없이 징벌을 내린다는 사실도 가슴에 새겨야 한다. 그 징벌에는 시간적으로 조금 빠르냐, 아니면 조금 늦냐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지금이야말로 대권의 계절이다. 대권을 위해 나선 정치인들은 권력이 달콤한 맛을 주는 사탕과 같은 것이 아니라 부메랑처럼 사나운 복수를 할 수 있는 괴물이라는 사실을 최근의 권력비리를 보며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박효종 < 서울대 정치학 교수 parkp@sn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