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이후 가계부채가 가처분소득에 비해 빠른 속도로 증가함에 따라 가계부채 수준 및 증가 속도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과도한 가계부채는 가계 및 금융기관 부실로 이어져 우리 경제의 건전성을 위협한다. 또한 금융불안을 초래해 정책당국의 경제 정책 수행에 부담을 주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특히 최근에는 고소득 가계의 흑자폭은 확대되는 반면 저소득 가계의 가계수지는 악화되면서 채무상환 능력이 낮은 저소득층의 부실위험이 높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올 하반기 한국은행과 서민금융 지원 방안에 대해 협의해 나가기로 했다. 한은이 은행에 저리로 자금을 지원하면 은행들이 이 자금을 활용해 저신용·저소득층에 대한 대출을 확대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이는 금융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중앙은행의 역할을 확대한 것으로 평가된다.

발권력을 바탕으로 금융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해 금융불안을 해소하는 것은 중앙은행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이다. 지난해 ‘한은법’ 개정을 통해 한은은 법상으로도 금융안정 책무를 명시적으로 부여받았다. 한은법상 금융안정을 수행하기 위해 금융기관에 대해 다양한 여신(대출)을 할 수 있으며 금융기관 이외의 금융업을 영위하는 기관에 대해서도 긴급 여신을 지원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확보하고 있다.

이에 앞서 한은은 2006년에도 정부의 저소득층 채무재조정 대책에 동참, 산업은행을 통해 자산관리공사에 자금을 지원한 사례가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가 남아있던 2009년에는 산업은행을 통해 ‘은행자본확충펀드’를 조성한 바 있다.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 대출 대책과 관련해 은행의 자기자본 확충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같은 조치는 금융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해 금융불안을 해소한 사례로 평가된다.

금융기관이 스스로 자금의 공급자와 수요자를 연결해 주는 본연의 기능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어려울 때 금융불안이 발생한다. 거래 상대방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지면서 자금을 빌려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정책당국은 시장원리가 정상적으로 작동되는 금융안정이 이뤄질 때까지 정책지원을 통해 시장 참가자가 신뢰를 갖고 금융거래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한은이 은행권에 저리로 자금을 지원해 저신용·저소득층에 대한 대출확대를 유도하는 것은 시장원리로 볼 때, 신용공급이 제한된 저신용·저소득층 대출시장 내에 정상적인 자금중개가 이뤄지도록 정책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미 한은은 1994년부터 총액한도대출제도를 지속적으로 운용하고 있다. 대기업에 비해 신용도와 담보력이 취약한 중소기업의 자금이용 기회를 확대하고 조달비용을 줄여주기 위한 제도다. 한은의 저신용·저소득층 대출시장에 대한 유동성 공급도 이와 비슷한 조치로 볼 수 있다.

저신용·저소득층 대출시장은 은행권의 서민금융지원 확대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은행 입장에서 볼 때 저신용자 대출은 대부분 소액이고 단기상품이어서 취급 및 유지·관리비용이 높은 편이다. 또한 자산건전성 지표를 중시하는 상황에서 저신용자 대상 대출영업에 적극 나서기 힘든 실정이다.

저소득 서민층은 은행을 이용한 실적이 많지 않다. 그래서 신용기록이 충분하지 않다. 은행 역시 서민금융 취급실적이 많지 않아 저소득자에 대한 신용위험을 제대로 평가하기 힘들다. 신용평가 모형이 없어 얼마를 언제까지 대출할 경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지 판단하기 어렵다. 이에 따라 차입자의 상환능력에 대한 정보비대칭성, 신용평가 모형의 품질 미흡 등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적절한 수준에 비해 대출(신용)이 적게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다.

저신용·저소득층 대출시장은 시장원리만으로는 원활한 자금 수급을 기대하기 어려운 곳이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한은이 이들 대출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은 금융시장의 실패를 보정하기 위한 정책적인 노력으로 평가된다. 다만 서민금융의 경우 전통적인 금융기법과는 다소 다른 측면이 있는 점을 고려해 한은이 은행권을 통해 자금을 지원하되 이 중 일부 자금은 상호저축은행, 상호금융기관 등 서민금융기관을 통해서도 공급하는 방식을 고려해 볼 만하다. 이 같은 조치는 서민금융기관의 경쟁력이 약화되지 않는 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

한은의 금융안정 역할은 금융위기 발생시 충분한 유동성을 공급하는 최종대부자 기능뿐만 아니라 금융시스템 불안요인에 대한 예방적이고 선제적인 정책수행까지 포함한다. 우리나라 가계대출은 연체율이 아직 낮고 채무상환능력이 양호한 중상위 소득계층이 가계부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단기간에 대규모로 부실화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러나 가계부채 문제가 중장기적으로는 시스템리스크(시장 전체 기능을 마비시킬 수 있는 위험)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카드론 등 소비성 대출이 빠르게 증가하고 주택담보대출이 주택구입 이외의 목적으로 활용되면서 가계대출의 질적 건전성이 크게 악화되고 있다.

더욱이 주택가격 하락이 우려되는 현 상황에서 경기부진이 장기간 지속되면 50세 이상 연령층, 자영업자, 임시·일용직 근로자 등 월소득이 들쑥날쑥하는 취약한 계층의 대출이 부실화돼 경제위기로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한은의 저소득층 대출시장에 대한 유동성 지원은 잠재적 금융불안 요인에 대한 선제적인 정책대응으로 파악될 수 있다.

한은의 유동성 공급을 저신용·저소득층에 대한 지원이라는 복지정책적 관점에서 보면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취약계층에 대한 복지혜택은 재정을 통해 지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이 정책이 위기시 마지막에 돈을 대줘야 하는 최종대부자로서 중앙은행의 역할에 부합하는지도 거론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정책이 취약계층의 유동성 악화로 인한 가계부채의 대규모 부실화를 예방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시장실패를 보정함으로써 자원배분의 효율성을 제고하는 측면이 크다. 서민금융에 대한 금융회사의 경험과 신용평가 관련 정보가 축적될 수 있도록 일정기간 저신용·저소득층의 대출시장 조성에 기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한은의 서민금융 지원 정책은 금융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중앙은행 본연의 역할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임진 < 금융硏 연구위원 >

△서울대 경제학과 △텍사스오스틴대 경제학 박사 △한국은행 조사국 △G20정상회의 준비위 연구자문실 자문관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