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지리산 둘레길 전체 구간이 개통됐다. 2008년 4월 시범 구간으로 첫 선을 보인 지 4년 만이다. 지리산은 예로부터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불렸고,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는 등 한국인들의 마음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명산이다.

지리산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대표적인 학자는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이다. 평생 10번 이상 지리산을 다녀왔고, 말년에는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다 보이는 산천재(山天齋)에 거처를 잡았다. 그의 묘소 또한 지리산 자락에 조성돼 있다. 조식은 1558년(명종13) 첫 여름 제자들과 함께 지리산 유람길에 나섰다. 이때의 기행을 ‘유두류록(遊頭流錄)’이라는 기행문으로 남겼다.

“가정(嘉靖) 무오년(1558) 첫 여름에 진주 목사 김홍, 홍지·수재(秀才) 이공량, 인숙·고령 현감 이희안, 우옹·청주 목사 이정, 강이 및 나는 함께 두류산을 유람했다. 산 속에서는 나이를 귀하게 여기고 관작을 숭상하지 않으므로 술잔을 돌리거나 자리를 정할 때에도 나이로서 했다. (…) 11일 내가 있는 계부당(鷄伏堂)에서 식사를 하고 여정에 올랐는데, 아우 조환이 따라왔다.”

기행문의 첫 부분은 지리산 유람을 함께한 사람들의 명단이다. 이공량(1500~?)은 조식의 자형이며, 이희안(1504~1559)과 이정(1512~1571)은 조식의 문인이다. 뇌룡사와 계부당은 합천에 있는 강학처로 조식이 48세부터 61세까지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길렀던 곳이다. 조식 일행은 16일 섬진강에 다다랐다.

“멀리 구름 낀 산이 서북쪽 십리 사이에 나타났는데 이것이 두류산의 바깥쪽이다. (…) 눈 깜짝할 사이에 악양현을 지났는데 강가에 삽암이 있다. 이곳은 녹사 한유한의 옛집이 있던 곳이다. 한유한은 고려 왕조가 장차 어지럽게 될 것을 알고, 처자를 데리고 이곳에 와서 살았다. 징소하여 대비원(大悲院) 녹사로 삼았으나, 하루 저녁에 숨어 달아나 간 곳을 몰랐다고 한다. (…) 도탄에서 한 마장쯤 떨어진 곳에 정여창 선생의 옛 거처가 있었다. (…) 처자를 이끌고 산으로 들어갔었으나 나중에 내한을 거쳐 안음 현감으로 나아갔다가 교동주(喬桐主·연산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곳은 삽암과 십 리쯤 떨어진 곳이다. 밝은 철학자의 행·불행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19일 아침 조식 일행은 청학동으로 들어갈 것을 계획했다. 이 부분에는 호남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합세하는 장면이 보인다. 21일에도 호남에서 온 여러 사람과 함께 날이 저물도록 절의 누각에 앉아서 불어난 시냇물 구경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지리산은 조선시대에도 영남의 선비와 호남의 선비들을 소통시키는 공간임을 알 수 있다.

조식은 지리산 유람 중에도 부역에 허덕이는 백성들의 힘든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백성과 군졸이 유망(流亡)하는 것이 현실인데 자신은 한가로이 유람을 하는 것에 대해 자책을 하기도 했다.

“쌍계사와 신응사 두 절이 모두 두류산 중심에 있어 푸른 준령이 하늘을 찌르고 흰 구름이 문을 잠근 듯해 밥짓는 연기가 드물게 닿을 것 같은데도 오히려 이곳까지 관가의 부역이 폐지되지 않아, 양식을 싸들고 무리를 지어 왕래함이 계속 잇달아서 모두 흩어져 떠나가기에 이르렀다. (…) 행정은 번거롭고 부역은 과중해 백성과 군졸이 유망해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보호하지 못한다. 조정에서 바야흐로 이를 크게 염려하는데, 우리가 그들의 등 뒤에 있으면서 여유작작하게 한가로이 노닐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참다운 즐거움이겠는가.”

조식은 ‘좌퇴계 우남명’으로 불릴 만큼 이황과 함께 16세기를 대표하는 사림파 학자이며, 경의(敬義)를 사상의 핵심으로 하면서 무엇보다 학문의 실천에 주력한 학자였다.

지역적 기반이 경상우도였던 만큼 그의 삶과 사상 형성에 있어서 지리산은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조식 일행이 걸었던 지리산 일대를 따라가 보면서 16세기 실천적 삶을 살았던 선비의 체취를 느껴보기 바란다.

신병주 < 건국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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