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 일이다. 형님의 갑작스런 교통사고는 군입대를 결심하는 계기가 됐다. 대학교 1학년을 마친 1973년 3월. 젊고 패기있던 시절 나는 해병대 입대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터라 주저없이 해병대를 자원했다. 베트남전쟁이 막바지인 때였고, 젊은이들 사이에선 베트남에서 용맹을 떨친 해병대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많은 시기였다. 요즘만큼은 아니지만 그때도 해병대지원 경쟁률은 높았다. 나는 시험과 체력테스트를 무난히 통과해 입대했고 그렇게 나의 해병 259기 생활은 시작되었다.

진해에서 12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배치된 곳은 해병 의장대였다. 그러나 잠시였다. 해군과 해병대가 통합되면서 서해 5도 최전방인 백령도로 배치됐다. 북한의 도발이 잦아지면서 최전방 전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백령도 근무 시절 에피소드도 많았지만 국민 모두가 아픈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1974년 8월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발생한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퍼스트 레이디가 국가 공식행사에서 저격당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전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상황은 육해공군 할 것 없이 전군이 비상사태였다. 특히 백령도는 전시에 준하는 상태였다. 그 사건 발생 이후 몇 달간 군화와 전투복을 벗어본 적이 없었는데 그때의 무좀이 아직도 나를 괴롭힐 때가 있다. 내가 근무했던 곳에서 보면 옛날 심청이가 공양미 300석에 몸을 던졌다는 인당수와 북한의 장산곶이 보인다. 게다가 바로 맞은편 북한 황해도까지는 헤엄쳐서 건너갈 수도 있는 거리의 서해 백령도 최북단이었다.

요즘은 백령도까지 가는 쾌속선이 생겨 인천에서 뱃길로 4시간 정도면 갈수 있지만 당시는 탱고라 불리는 군용선박으로 오가던 때라 백령도에서 인천까지 16시간 이상이 걸렸다.

백령도에는 초계명령이 자주 떨어진다. 한 번은 휴가를 받아 인천으로 가던 중 초계명령이 떨어져 바다 위 선상에서 꼬박 이틀을 보낸 적도 있었다.

또 하나의 추억은 해병대 IBS훈련이다. 7명의 조원들이 기습상륙작전을 위한 고무보트를 이용해 들고 나르고 이고 젓고 하는 훈련이다. 무엇보다도 팀워크가 중요하다.

특히, 헤드캐링(보트를 머리에 이고 이동하는 것)을 할 때 나는 다른 전우보다 키가 커서 힘들었다. 훈련이 끝나고 나면 키가 작은 고참 및 동료 전우들이 항상 미안한 마음으로 나에게 신경을 써주곤 했다. 가족 이상으로 정이 갔던 친구들인데 지금도 생각이 난다.


해병은 뭉치면 상상 이상의 힘을 발휘한다. 해병 출신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끈끈한 유대감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다같이 고생하고 어려운 군대생활을 잘 극복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입행 후 은행생활을 하면서 어렵고 힘든 일을 함께한 직원들에게 특별한 애정이 간다.

최근 은행장에 취임하면서 연일 강행군이다. 아침 7시부터 밤 늦게까지 빠쁜 일정을 소화해내면서 천근만근 몸이지만 젊은 시절 몸에 밴 해병의 인내력이 정말 도움이 될 때가 많다. 나는 어려운 일에 부딪칠 때는 마음 속으로 항상 해병대 근무 시절을 떠올리면서 문제를 해결한다. 그래서 나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해병대 군생활을 강력 추천한다.

이젠 세월이 흘러 아련한 추억이 됐지만 지금 나를 있게 해준 가장 소중한 경험이 40년 전 백령도의 칼바람과 함께했던 군대생활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