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번역원과 함께하는 인문학 산책] 지식인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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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이 되진 못했지만 독립운동 도왔던 유학자들…지식인의 현실 참여 모범돼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교수 >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교수 >
나라도 잃고 할 일도 잃어야 했던 일제강점기의 선비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을까. 평생을 공부한 한문은 이미 쓸모가 없어졌고 한문을 버리고 공맹(孔孟)을 욕해야 개명한 선각자로 취급받던 그 시절에도, 그들은 변화하는 세상을 외면한 채 농부는 농사를 지어야 하고, 매미는 하염없이 울어야 하듯이 그저 한문을 읽고 후세에 누가 읽어줄지도 모를 한문을 지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한문은 글종자(文種)인들 이을 수 있었을까. 도학자요 문장가로 영남에서 이름난 학자인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성산(性山) 허혁(許爀· 1851~1939)에게 보낸 답서(答書)를 읽어보자.
‘보내온 편지를 읽어보니 우리 동방의 학문은 체(體)만 있고 용(用)이 없어서 서양의 학문에 모멸을 당한다고 개탄하시고 저로 하여금 후학들을 인도할 때 경술(經術)을 뿌리로 삼고 경제와 법률을 함께 공부하게 하라고 하시니, (…) 대저 경제와 법률은 애초에 경술의 범위 밖에 있지 않지만 그 본말과 조목은 구별이 없을 수 없습니다. 예컨대 《서경(書經)》 ‘주관(周官)’과 ‘입정(立政)’에 열거된 것이 이 일인데, 《주례(周禮)》에서는 육덕(六德)과 육행(六行)을 근본으로 삼아 놓고 육예(六藝)로써 뒤를 이은 것이 이런 경우입니다. ’
회봉은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거론하며 유가(儒家) 경서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아 폐해가 크다고 개탄한다.
‘중고(中古) 이래로 우리나라의 풍속이 경술을 중시하고 공맹을 존숭했으나 사실은 한갓 헛된 형식만 남았을 뿐 진리는 없어졌으니, 그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더구나 지금 서양의 오랑캐들이 건너와서 세상의 질서가 뒤집혀 세상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육경(六經)은 지금 시세(時勢)에 맞지 않고 공자는 서양의 철인보다 못하다고들 하니, 비록 진(秦)나라 때와 같은 분서(焚書)는 없지만 옛 전적(典籍)들이 불타버린 지는 오랜 셈입니다.’
회봉의 답신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이런 때에 시속(時俗)에 전혀 어두운 한두 젊은이들이 이 적막한 산골로 나를 찾아와서 주공, 공자의 글을 읽어 사람의 도리를 조금이라도 아니, 그 정상이 불쌍하고 그 형세가 매우 외롭다 하겠습니다. 게다가 다른 공부까지 하게 한다면 다른 공부는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것이고 우리 구학(舊學)은 많은 사람들이 다 같이 버리는 것이니 …’
성산이 보낸 편지에서 ‘우리 동방의 학문은 체(體)만 있고 용(用)이 없어서 서양의 학문에 모멸을 당한다’고 한 것은 이른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과 같은 취지다. 그런데 회봉은 정치, 경제가 사실은 유가(儒家) 경서의 학문 안에 들어있다고 하면서 우리나라에서 오래도록 이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아서 생긴 폐해가 더 크다고 지적하고, 지금 세상은 진시황이 분서(焚書)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개탄했다. 바깥세상의 변화를 외면하고 내면의 도학사상(道學思想)에 더욱 침잠함으로써 자기 삶의 명분을 찾았다고 생각된다.
이제 한문을 비판하던 시대는 지났다. 지금은 우리의 고전과 옛 기록들을 해독하기 위해 오히려 한문을 아는 학자들이 더욱 필요하게 됐다. 인문학은 시의(時宜)에 맞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유교에 훈고학, 성리학, 양명학, 고증학이 각각 그 시대의 요구에 부응했듯이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면 인문학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회봉은 국권을 잃은 암울한 현실에 몸으로 부딪쳐 선열(先烈)이 되지도 못했고 시대를 앞서가는 선각자로 자처하지도 않았다. 그저 구학을 공부한 학자로서 자기가 할 일을 분명히 알고 그 일을 묵묵히 하는 한편 파리장서사건 및 제2차 유림단사건(儒林團事件)에 참여해 옥고를 치르는 등 지식인으로서 당면한 책임을 피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지식인의 현실참여가 필요하고 돋보이는 시대가 많았다. 지금도 속없는 많은 지식인들이 덩달아 남의 말을 되뇌어 진보니 보수니 하면서 막연히 현실에 참여하는 양 한다. 지식인이 현실을 외면해서도 안 되겠지만 아무나 선각자가 되려고 해서도 곤란하지 않겠는가.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itkc.or.kr)의 ‘고전포럼-고전의 향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교수 >
‘보내온 편지를 읽어보니 우리 동방의 학문은 체(體)만 있고 용(用)이 없어서 서양의 학문에 모멸을 당한다고 개탄하시고 저로 하여금 후학들을 인도할 때 경술(經術)을 뿌리로 삼고 경제와 법률을 함께 공부하게 하라고 하시니, (…) 대저 경제와 법률은 애초에 경술의 범위 밖에 있지 않지만 그 본말과 조목은 구별이 없을 수 없습니다. 예컨대 《서경(書經)》 ‘주관(周官)’과 ‘입정(立政)’에 열거된 것이 이 일인데, 《주례(周禮)》에서는 육덕(六德)과 육행(六行)을 근본으로 삼아 놓고 육예(六藝)로써 뒤를 이은 것이 이런 경우입니다. ’
회봉은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거론하며 유가(儒家) 경서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아 폐해가 크다고 개탄한다.
‘중고(中古) 이래로 우리나라의 풍속이 경술을 중시하고 공맹을 존숭했으나 사실은 한갓 헛된 형식만 남았을 뿐 진리는 없어졌으니, 그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더구나 지금 서양의 오랑캐들이 건너와서 세상의 질서가 뒤집혀 세상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육경(六經)은 지금 시세(時勢)에 맞지 않고 공자는 서양의 철인보다 못하다고들 하니, 비록 진(秦)나라 때와 같은 분서(焚書)는 없지만 옛 전적(典籍)들이 불타버린 지는 오랜 셈입니다.’
회봉의 답신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이런 때에 시속(時俗)에 전혀 어두운 한두 젊은이들이 이 적막한 산골로 나를 찾아와서 주공, 공자의 글을 읽어 사람의 도리를 조금이라도 아니, 그 정상이 불쌍하고 그 형세가 매우 외롭다 하겠습니다. 게다가 다른 공부까지 하게 한다면 다른 공부는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것이고 우리 구학(舊學)은 많은 사람들이 다 같이 버리는 것이니 …’
성산이 보낸 편지에서 ‘우리 동방의 학문은 체(體)만 있고 용(用)이 없어서 서양의 학문에 모멸을 당한다’고 한 것은 이른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과 같은 취지다. 그런데 회봉은 정치, 경제가 사실은 유가(儒家) 경서의 학문 안에 들어있다고 하면서 우리나라에서 오래도록 이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아서 생긴 폐해가 더 크다고 지적하고, 지금 세상은 진시황이 분서(焚書)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개탄했다. 바깥세상의 변화를 외면하고 내면의 도학사상(道學思想)에 더욱 침잠함으로써 자기 삶의 명분을 찾았다고 생각된다.
이제 한문을 비판하던 시대는 지났다. 지금은 우리의 고전과 옛 기록들을 해독하기 위해 오히려 한문을 아는 학자들이 더욱 필요하게 됐다. 인문학은 시의(時宜)에 맞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유교에 훈고학, 성리학, 양명학, 고증학이 각각 그 시대의 요구에 부응했듯이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면 인문학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회봉은 국권을 잃은 암울한 현실에 몸으로 부딪쳐 선열(先烈)이 되지도 못했고 시대를 앞서가는 선각자로 자처하지도 않았다. 그저 구학을 공부한 학자로서 자기가 할 일을 분명히 알고 그 일을 묵묵히 하는 한편 파리장서사건 및 제2차 유림단사건(儒林團事件)에 참여해 옥고를 치르는 등 지식인으로서 당면한 책임을 피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지식인의 현실참여가 필요하고 돋보이는 시대가 많았다. 지금도 속없는 많은 지식인들이 덩달아 남의 말을 되뇌어 진보니 보수니 하면서 막연히 현실에 참여하는 양 한다. 지식인이 현실을 외면해서도 안 되겠지만 아무나 선각자가 되려고 해서도 곤란하지 않겠는가.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itkc.or.kr)의 ‘고전포럼-고전의 향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