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1762~1836)은 우리나라 지성사에 새로운 지평을 연 ‘선명자(善鳴者)’다. 그는 자신을 18년간 유배시킨 조선왕조에 ‘실학의 집대성’이라는 미증유의 찬란한 금자탑을 세워 헌정했다.

다산은 1809년 유배지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친구 김이재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우국애민의 심정을 이렇게 말했다. “중풍이 점점 심해지고 온갖 병이 생겨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처지다. 기꺼이 귀양지의 강물에 뼈를 버리더라도 애석할 것이 없으나 오직 우국지성을 발산할 길이 없어 점점 응어리가 됐다.” 또 다산은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느냐의 여부는 오직 나 한 사람의 기쁨과 슬픔일 뿐이지만, 지금 만백성이 다 죽게 되었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으냐”고 통탄했다.

그래서 다산은 “어느 것 하나라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어서 이를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할 것인데, 어찌 충신과 지사가 팔짱끼고 방관할 수 있겠느냐”고 개탄하며 개혁안을 제시했다.

주권재민과 정치계약설이 그 중심에 있다. 다산은 《탕론(湯論)》에서, 천자(황제)는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상향식으로 추대한 것이라고 했다. 추대하지 않으면 물러나야 하는 것이고, 물러나지 않으면 구후(九侯)와 팔백(八伯)이 의논해 천자를 바꾸는 것인데 신하가 임금을 축출했다고 누가 말하느냐고 했다. 이는 주권재민이자 백성에 의한 정체(Government by the people)이며, 천자방벌론(天子放伐論)은 국민소환제이자 정치계약설이라고 하겠다.

국민을 위한 정치, 위민주의(爲民主義)에도 엄격했다. 다산은 ‘목민관은 국민을 위해 있는 것(牧, 爲民有也)’이라고 강조했다. 《목민심서》 첫줄에서 ‘다른 벼슬은 구할 수 있으나 목민관을 하겠다고 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임금과 수령은 업무가 많고 적음의 차이만 있을 뿐 통치 행위는 같다고 보았다. 그래서 아무나 수령을 하겠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자신이 살던 시대를 ‘백성들은 땅으로 농토를 삼는데 관리들은 백성들로 전답을 삼는(民以土爲田, 吏以民爲田)’ 부패한 사회라며 개혁을 역설했다.

법치주의 실현과 정실주의 배격에 대한 생각도 뚜렷했다. 정조는 주치의였던 강명길을 삭령군수로 보냈고, 사도세자 능을 이장할 때 지관이었던 김양직에게 연천현감 직을 내렸다. 그런데 이들은 전형적인 탐관오리였다. 정조가 그간의 공로를 인정해 이들을 사면하자 다산은 “무릇 용법(用法)은 마땅히 임금의 가까운 신하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만큼 이 두 사람을 엄히 처벌해 백성을 소중히 여기고 국법을 높여야 한다”고 상소했다.

백성을 두루 잘살게 하는 방법도 고민했다. 균민주의(均民主義)다. 다산은《원정(原政)》에서 ‘정치란 바르게 하는 것(政也者, 正也)’이고 ‘우리 백성을 고루 살게 하는 것(均吾民也)’이라고 했다. 그리고 “어찌 토지의 이익을 겸병하여 부자를 더 부자되게 하고, 토지의 혜택을 받지 못하게 해서 가난한 사람을 더욱 가난하게 하는가. 토지와 백성을 계산해서 공평하게 분배해야 한다. 바르게 하는 것이 정치이니 정치란 백성을 고루 살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산의 정치사상은 조선후기 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 마스터 플랜이었다. 그러나 낡고 병든 조선은 그의 선명을 수용하지 않았고 결국 쇠락의 길을 걸었다. 선조들이 아무리 훌륭한 사상과 정신을 남겼더라도 후손들이 이를 계승 발전시키지 않는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다산의 우국애민의 정치사상은 우리 정치에 실현시켜야 할 소중한 아젠다다.

◆김상홍 단국대 석좌교수(68)는 40년 가까이 다산을 연구하고 있다. 다산학을 계승 발전시켜 청렴한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공공기관 등에서 반부패 청렴교육 전문 교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다산학의 신조명》《아버지 다산》《다산학 연구》 등 8권의 다산 관련 저서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