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인터뷰] "경제민주화로 기업 너무 몰아붙이면 투자만 위축시킬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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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의 싱크탱크' 한국경제연구원 최병일 원장
‘재계의 싱크탱크’ 격인 한국경제연구원이 오랜만에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경연은 새누리당 내부에서조차 경제민주화를 최우선 정책 과제로 삼는 기류가 나타나자 최근 잇따라 ‘경제민주화 지상론’을 경고하는 세미나를 열고 연구자료를 발표하고 있다. 지난해 원장 교체를 둘러싸고 내홍을 겪은 탓에 제 역할을 못했지만 최근엔 재계 이슈에 발빠르게 대응한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그 일선에 서 있는 사람이 지난해 12월부터 한경연을 이끌고 있는 최병일 원장(54)이다. 그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타결됐을 때 통상 관료들과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뉴라이트전국연합 공동대표를 맡기도 한 현실 참여형의 우파 경제학자다. 최 원장은 그러나 이른바 ‘꼴보(꼴통 보수)’는 아니다. “재벌 빵집은 경제학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심정적으로는 안했으면 좋겠다”는 게 골목상권 논쟁에 대한 그의 입장이다. “경제민주화로 기업들을 너무 몰아세우면 그들이 떠날 것”이라고 우려하면서도 “기업 오너의 횡령, 배임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물게 해야 한다”는 균형 잡힌 시각을 갖고 있다. 최 원장을 서울 여의도 한경연 원장실에서 만났다.
▷한경연의 활동이 다소 활발해졌습니다. 재계가 경제민주화 등에 대해 본격적으로 대응하는 것으로 봐도 될까요.
“우린 싱크탱크이지, 시민단체(NGO)가 아닙니다. 정책 효과나 실현 가능성 등을 따져 보고 대안을 제시하는 게 본업이죠. 최근 많은 일들이 ‘공짜점심’처럼 인식되고 있으니 누군가는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그걸 우리가 하려 합니다. 대기업 문제, 복지 문제, 노동 문제, 저출산 고령화 등의 파장을 따져보고 싶습니다. 또 대기업 중심의 패러다임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우리 발전 수준을 감안할 때 복지 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얘기가 많습니다.
“우리 국민소득 2만달러를 구매력으로 평가하면 프랑스와 거의 비슷합니다. 거시지표로 보면 선진국이고, 또 저성장 기조를 받아들여야 할 때가 됐는데 의식구조는 아직도 고성장하던 때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 격차를 메우는 게 정치인의 역할인데 정치는 너무 복지 프레임으로 가버렸어요. 현 단계에 적절한 복지 수준이 무엇인지, 이를 위해서는 얼마나 부담을 해야 할지를 면밀히 고민해야 하는데 이런 게 총체적으로 빠져 있습니다.”
▷우리에게 맞는 지속가능한 복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연구과제입니다. 그동안 재원에 대해 아무도 제대로 얘길 안하고 있었어요. 각 당은 이 정도 든다고 하는데 꼼꼼히 추계를 해봐야 합니다. 그 작업을 하기 위해 이제 첫 삽을 뜬 겁니다. 정부가 계속 퍼주기만 하면 밑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되고 말죠. 복지라는 게 후손에 부담을 주면서 앞선 세대가 혜택을 받는 것인데, 그걸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복지하다 거덜난 국가가 바로 그리스 아닙니까.”
▷스웨덴은 복지가 좋으면서도 멀쩡하지 않습니까.
“스웨덴을 복지국가로만 알고 있으나 그건 역사적 맥락에서 봐야 합니다. 스웨덴 하면 노벨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데, 다이너마이트가 필요할 정도로 광물자원이 많고 1900년대 초부터 발렌베리가와 볼보 에릭슨 등이 버틴 제조업 강국입니다. 그래서 복지란 그림을 그릴 수 있었죠. 인구가 1000만명도 안 되고 1, 2차 대전에 엮이지 않아 부도 축적됐고요. 2차 대전 이후 정치인들이 복지 프레임을 갖고 나오면서 소득세를 올렸지만 대신 상속세는 없습니다. 그 뒤에 테니스 스타 비외른 보리 등 많은 사람이 높은 세금 탓에 스웨덴을 떠나자 세율을 수정해 왔습니다. 1990년대 초 외환위기를 겪고 나서는 복지 프레임을 유지하되 기업은 옥죄지 말자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적정한 경제민주화 수준은 어느 정도라고 보십니까.
“경제민주화도 지속가능한 수준이어야 합니다. 또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시각에서 봐야 합니다. 우리는 제조업 국가이고, 우리 경제가 여기까지 온 것도 1970년대 중화학공업 정책이 시발점이 된 대기업 중심의 성장 정책 덕입니다. 이런 구조 속에서 경제민주화를 어떻게 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경제민주화만 너무 강조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헌법을 보면 자유시장경제가 원칙이고 경제민주화는 보완적인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한쪽으로 몰리니 문제가 있어요. 경제적으로 효율적인지, 지속 가능한지 그런 고민이 없이 표를 얻기 위해 경제민주화라는 게 나왔으니 제대로 따져보는 장을 열고 싶습니다. 그래서 세미나에서 경제민주화를 법적·철학적·경제적으로 따져본 거고요. 앞으로는 경제민주화를 어떻게 할 것인지 제대로 찾아볼 겁니다.”
▷경제민주화 측면에서 우리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나라가 있을까요.
“아르헨티나라고 봅니다. 최근 통신사 국유화 추진 등 정치가 경제를 압도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다 보니 기득권층은 부를 해외로 계속 빼돌리고 있습니다. 인간은 상황에 적응하는 존재입니다. 경제민주화를 하는데 그 방향이 기업 부담을 늘리는 것이라면 기업들이 떠나고 투자하지 않을 것입니다. 경제민주화를 하지 말자는 게 아니라 양자 모두 행복할 수 있는 희망을 만들어보자는 겁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대기업들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지난해 무역 1조달러를 이룩했는데 국민들은 별 감흥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용 없는 성장, 양극화, 낙수효과가 없다는 말만 나오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들이 학계에서 제대로 검증된 적 있나 싶습니다. 진정한 고민이 없는 것이죠. 3~4% 성장하는 거 괜찮은 겁니다. 국민소득 2만달러 수준에서 매년 이 정도 성장하는 나라가 없습니다. 그런데 고용 없는 성장이라며 대기업 탓하는 건 잘못이라고 봅니다.”
▷재계가 반성해야 할 부분도 있을 텐데요.
“대기업들이 성장하는 데 국민들의 직·간접 지원이 있었고 세제 혜택을 많이 받았습니다. 정부가 해외 기업과의 경쟁을 막아준 측면도 있고요. 그만큼 기업들은 사회적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그에 걸맞은 일을 하고 있나 되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장학금 주고 헌금하고 봉사활동하라는 게 아닙니다. 계속 투자하고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게 중요합니다. 동시에 대한민국 법인으로서 ‘법 앞에 다 똑같다’ 이런 인식을 심어줘야 합니다.”
▷법 앞에서의 평등을 강조하시는데요.
“기업 오너도 탈법·범법 행위를 해선 안 되고 어겼을 땐 법에 따라 재판 결과를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통령이 이런 저런 이유로 사면권을 남용한 측면도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이 생겨났고요. 이렇게 되니 사람들이 자기 어려움에 대해 내 책임이라기보다는 다른 이유 탓으로 전가하게 되는 겁니다. 법 앞에 평등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인식, 이게 사회 발전에 아주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횡령, 배임을 한 오너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봅니다.”
▷골목상권 논란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기업이 빵집해서 골목상권이 망했다고 하는데 경제논리로는 문제가 없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안했으면 좋겠습니다. 대기업은 핵심 역량 위주로 사업을 펼치는 게 맞습니다.”
▷유럽 위기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우리는 표면적으로 외환보유액도 많고 재정건전성도 괜찮다고 하지만 그 파고를 견디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중국의 최대 수출시장이 유럽이고, 우리 최대 수출시장이 중국이기 때문이죠. 중요한 건 ‘베스트 시나리오’로 가더라도 영향이 있을 것이란 점입니다.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 개혁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위기의 일상화’가 나타날 것으로 보입니다. 내수를 키워 수출과 함께 균형 잡힌 구조로 가지 않으면 큰 타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구가 적어 내수 위주로 가기엔 어려움이 있지 않습니까.
“한국은 아직 충격을 덜 받은 편인데 좀 더 안전한 쪽으로 가야 합니다. 내수를 확충해 수출의존적인 불균형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얘기인데, 몇 년 전부터 계속 나온 아젠다이지만 실천이 안 되고 있어요. 현재 한국만을 내수로 보기에는 부족하고, 서울에서 비행기로 2시간 거리까지를 내수로 보는 ‘확장된 내수’를 추진했으면 합니다. 예를 들어 중국 해안 지방을 대상으로 의료 서비스 등을 제공하면 일자리가 크게 늘어날 수 있을 겁니다.”
최병일 원장은
초등학교때부터 4시 기상…서울대 야구단 창단 주역
한국의 대표적인 통상 전문가로 꼽힌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예일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0~1994년 우루과이라운드 서비스협상 한국 대표, 1994~1997년 세계무역기구(WTO) 통신기본협상 수석대표 등을 지냈다. 1997년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창설 멤버로 학계에 돌아간 그는 2006년 한·미 FTA 협상이 시작되자 외교통상부 정책자문위원, FTA 민간대책위 민간자문위원 등을 맡으며 협상을 적극 지원했다.
이후 뉴라이트전국연합 공동대표,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원장 등을 거쳐 지난해 12월 한경연 신임 원장을 맡았다. 최 원장은 한경연을 미국의 헤리티지재단과 같이 독립된 싱크탱크로 만드는 데 몰두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새벽 4시면 일어난다고 한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다닐 때 처음으로 서울대에 야구클럽을 결성했으며 아직도 후배들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김현석/정인설 기자 realis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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