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카타르 왕가의 칼리파 알타니 공주(29)는 지난해 말 그리스 선박재벌 게오르게 엠비리코스로부터 세잔의 수채화 ‘카드놀이하는 사람들’을 2억5000만달러에 구매했다. 아트딜러인 윌리엄 아쿠아벨라와 래리 가고시안이 거래를 주관한 이 작품은 세계 회화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2. 영국의 백만장자 리리 사프라(74)는 2010년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자코메티의 1960년대 조각을 6500만1250파운드(1197억원)에 사들였다. 브라질 태생의 자선사업가 사프라는 1999년 모나코 자택에서 사망한 레바논 출신 스위스 은행가 고(故) 에드몬드 사프라의 미망인이다.

재산 1억달러 이상 ‘슈퍼 리치’들이 초고가 미술품을 사들이며 국제 미술시장의 훈풍을 이끌고 있다. 이들은 올 들어 런던과 뉴욕 경매시장에서만 에드바르트 뭉크를 비롯해 파블로 피카소, 클로드 모네, 폴 세잔, 잭슨 폴록, 바넷 뉴먼, 리히터, 알렉산더 칼더, 이브 클랭, 프란시스 베이컨, 셰리 레빈 등 인상파 및 근·현대 미술가들의 수작 2조1000억원어치를 사들였다.

유럽 재정위기 이후 투자 포트폴리오 다변화와 주식 및 외환시장의 극심한 변동성을 헤지(위험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미술품이 각광받고 있기 때문이다. 슈퍼 리치들의 왕성한 ‘미술품 식욕’에 지난해 그림 가치는 10.2% 정도 상승했다.

크리스티의 스티븐 머치 최고경영자는 “컬렉터와 투자자들은 경제상황이 급속하게 변할 때 미술품을 현금처럼 안전한 자산으로 여긴다”며 “슈퍼 리치들은 화랑과 경매시장을 통해 연간 20조~30조원을 미술품 구입에 쏟아붓고 있다”고 말했다.

○1000만달러 넘는 작품 줄줄이 낙찰

슈퍼 리치들의 왕성한 ‘미술품 식욕’에 국제 미술시장에서 그림값이 치솟고 있다. 지난달 소더비와 크리스티가 뉴욕에서 가진 인상주의 및 근·현대화가 작품 경매에는 1000만달러 이상 거래된 작품만도 24점이나 됐다.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의 ‘절규’는 미국과 중국인 부호 등의 응찰 경합 끝에 12분 만에 1억1992만달러까지 치솟으며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영국 인기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의 ‘거울 속 비친 얼굴’과 미국 팝아티스트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잠자는 소녀’는 4488만달러(529억원·수수료 포함)에 낙찰됐다. 슈퍼 리치 사이에 베이컨과 리히텐슈타인이 국제 현대미술시장에서 ‘황제주’임을 다시 한번 과시한 셈이다.

이브 클랭의 자화상(3648만달러), 앤디 워홀의 ‘더블 엘비스’(3704만달러), 마크 로스코의 ‘오렌지·레드·옐로’(3500만달러), 잭슨 폴록의 ‘넘버 28’(2304만달러), 피카소의 ‘의자에 앉아 있는 여인’(2920만달러), 세잔의 수채화 ‘카드놀이 하는 사람’(1912만달러), 마티스의 종이 작품 ‘작약’(1912만달러), 윌렘 드 쿠닝의 ‘무제Ⅰ’(1408만달러), 바넷 뉴먼의 ‘Onement V’(2248만달러) 등 수작들도 부호들의 품에 안겼다.

○‘슈퍼 리치’들의 왕성한 식욕

파이낸셜타임스는 “금융위기 이후 주식·외환시장의 극심한 변동성을 헤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미술품이 각광받고 있다”며 “2007년까지 헤지펀드들의 자금과 월스트리트 고액 연봉자가 미술시장의 단골 고객이었다면 최근 국제 미술계의 ‘큰손’은 단연 러시아와 중동, 중국 부자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첼시 구단주인 러시아 석유 재벌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2008년 5월 소더비 런던경매에서 프란시스 베이컨의 1976년작 ‘삼면화(the Triptych)’를 8628만달러에 구입해 화제가 됐다. 모델 출신 여인 다리야 다샤 주코바도 모스크바에 ‘현대미술 창고 센터(The Garage Center for Contemporary Culture)’를 개관해 명작들을 컬렉션하고 있다.

중국 미술품 ‘파워컬렉터’ 류이첸, 왕웨이 부부도 상하이에 미술관을 신축하면서 최근까지 3600억원어치의 작품을 사들였다. 2010년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쩡판즈(曾梵志)의 ‘가면’ 시리즈를 43억원에 구입했고, 소더비 홍콩경매에서도 240억원어치를 샀다. 인도네시아 부호 위더야오(余德耀)는 장샤오강의 ‘창세편’을 62억원에 구입했다. 중국 상하이 민생은행도 류샤오둥과 쩡판즈의 작품 수집에 170억원을 썼다. 중국계 인도네시아의 부호인 부디 텍도 ‘파워 컬렉터’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세계 회화 사상 최고가인 세잔의 수채화(2억5000만달러)를 구입한 알타니 공주 역시 2014년 카타르국립미술관 개관을 위해 미국 추상화가 마크 로스코, 앤디 워홀, 데미안 허스트 등 스타 작가들의 작품 수천만달러어치를 사들이며 그림값 상승에 동참했다.

구찌, 알렉산더 맥퀸, 스텔라 매카트니 등 명품 브랜드를 보유한 PPR(피노프랭탕르두트)그룹의 프랑수아 피노 회장은 세계적인 경매회사 크리스티를 소유하며 세계 미술시장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프랑스 출신이지만 이탈리아 베니스에 팔라조 그라시(2006년)와 푼타 델라 도가나 미술관(2009년)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지난 40여년간 인상파 그림을 포함해 제프 쿤스, 무라카미 다카시, 신디셔면, 데미안 허스트 등 쟁쟁한 현대미술가 작품 2000여점을 구입했다. 피노 회장은 최근 들어 중국 작가 장환과 쩡판즈, 토마스 하우시고와 제이콥 카세이 작품을 사들이며 가격 상승을 이끌었다.

이 밖에 미국 유명작가 작품을 다수 보유한 헤지펀드 매니저 스티브 코헨을 비롯해 화장품 회사 에스티로더 창업자의 아들인 로널드 로더, 앤디 워홀 작품 800여점을 소장한 무그라비 형제, 뮤지컬 작곡가인 앤드루 로이드 웨버, 명품 제조업체인 프랑스 루이비통 모에 헤네시(LVMH) 최고경영자 베르나르 아르노 부부, 골드만삭스 창업자 아르투르 왈터, 월마트의 상속녀로 아칸소에 초대형 미술관을 짓고 있는 앨리스 월튼, 이탈리아 명품브랜드 프라다(PRADA)의 미우치아 프라다, 중국 타이캉보험 대표 첸동셍 등도 미술품 투자에 공을 들이고 있다.

씨티그룹이 발표한 ‘2012년 부(富)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말 재산 1억달러(1130억원) 이상 슈퍼 리치 인구는 6만3000여명. 이 가운데 아시아가 2만1000여명으로 가장 많고 북미 1만7000명, 유럽 1만7000명, 남미 5000명, 중동 2000명 순으로 나타났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