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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마을] "내가 죽으면 우리말도, 전통도…다 사라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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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
    니컬러스 에번스 지음 / 김기혁 외 옮김 / 글항아리 / 500쪽 / 2만3000원

    호주 북부 달라본어 등 소멸 위기 소수어 현장 보고
    정치·종교·사상과 맞물린 언어의 생사 생생하게 담아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죽을지도 몰라.”

    호주 북부의 소수어인 달라본어를 쓰는 앨리스 뵘은 이렇게 중얼거린다. 그가 말하는 ‘죽는다는 것’은 생명의 소멸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의 언어공동체가 간직한 전통과 지혜, 그것을 아우르는 문화 전반의 소멸을 뜻한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는 언어의 소멸에 대한 현장 보고서다. ‘현장 언어학자’로 정평이 난 니컬러스 에번스는 사라질 위기에 처한 언어를 찾아다니며 ‘현장 탐사 보고서’를 썼다. 우리의 삶에서 다양한 언어가 생존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살필 수 있다.

    2010년 12월, 유네스코의 ‘소멸 위기 언어 레드북 홈페이지’에 제주 방언이 인도의 코로어와 함께 ‘소멸 위기 언어’로 등재됐다. 제주어는 유네스코 기준으로 4단계인 ‘아주 심각한 위기에 처한 언어’로 규정됐다. 가장 심각한 상태인 ‘소멸하는 언어’ 바로 직전에 해당하는 단계다.

    책은 사라져 가는 언어에 대한 증언들로 가득 차 있다. 이 언어들의 화자들은 ‘보편적’인 사람들과는 다르게 사고한다. 예컨대 호주 퀸즐랜드 주 벤팅크 섬의 원주민들이 쓰는 카야르딜드어는 “이 책의 동쪽 페이지를 당신 무릎에서 북쪽으로 약간 움직여보라”고 말한다. 이 지시를 따르려면 낯설게 사고해야 한다. 카야르딜드어 화자들은 방향을 나침반의 방식으로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자연스럽게 소수언어만이 아닌 전체 언어의 의미를 알려준다. 우리는 언어대로 사고한다. 단어에도 성별이 있어 그 이미지를 관련해 떠올리는 독일어와 같은 이치다.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소수 언어구사자들의 능력은 학력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람들의 선입견을 불식시킨다. 정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칼럼어를 쓰는 샘 마즈넵은 방대한 양의 민족생물학 정보를 모아 이를 칼럼어와 톡피신어로 녹음하고 받아 적었다. 그는 인류학자 불머의 현지 보조자 역할을 수행하면서 칼럼족의 전통적인 생물학적 지식을 다룬 두 권의 논문을 출간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저자는 또 언어 생성과 소멸의 역사는 정치, 종교, 사상의 역사와 맞물려 있다고 역설한다. 16세기 오스만제국 궁중에서는 수화를 사용했다. 벙어리 하인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궁 속의 은밀한 대화와 정보를 타인에게 전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궁에서 일할 수 있었다.

    언어연구의 역사도 마찬가지. 식민지 ‘신세계’에 대한 열광적 호기심이 스페인에 퍼져 있던 시절,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사아군은 원주민 인디언들의 옛 관습을 모아 기록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의 작업은 오늘날 소수언어를 탐구하는 언어학자들의 그것과 비슷했고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종교재판이 횡행하게 되자 그의 작업은 ‘악마의 사역’으로 간주됐다. 자연스럽게 재정지원도 중단돼 그는 더 이상 작업을 할 수 없게 됐다.

    언어는 인간의 삶과 문화와 직결된다. 언어가 없다면 문화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책은 공기와 같이 깨닫기 어렵지만 필수적인 언어의 존재를 다양한 사례를 통해 알려준다. 언어학이라는 접하기 어려운 분야를 ‘현장성’으로 극복했다. 추상적이고 규범적인 논의에서 벗어나 흥미로운 에피소드로 채워져 있다.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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