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나선 미국 자동차 여행길을 당황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는 ‘척도’다. 습관대로 계기판의 숫자를 보고 액셀러레이터를 밟다 보면 속도위반으로 걸리기 십상이다. TV 기상캐스터는 우리나라의 한여름 더위쯤인데도 연일 60도를 넘는다며 호들갑을 떤다. 슈퍼마켓에서 소고기를 살 때도 헷갈리기는 마찬가지다. 그게 저녁으로 먹기에 충분한 양인지 눈으로 보고 집어들었으면서도 잘 모르겠다.

두 나라에서 사용하는 척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 사람들은 우리와 다른 척도를 사용한다. 거리는 ‘마일(mile)’, 온도는 ‘화씨(℉)’, 무게는 ‘파운드(lb)’를 쓴다. 우리처럼 각각 ‘미터(m)’ ‘섭씨(℃)’ ‘킬로그램(㎏)’을 쓰는 나라의 여행객들은 매 순간 본능적으로 환산하느라 머리에 쥐가 날 정도다. 미국 사람들은 왜 우리와 다른 척도를 사용할까. 우리가 사용해 익숙한 ‘미터법’이 도량형의 대세가 아닌가. 그 미터법은 어디에서 만들어졌고, 어떻게 세상에 퍼졌을까. 우리의 삶 속에서 척도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로버트 크리스 미국 스토니브룩대 교수가 쓴 《측정의 역사》는 이런 질문에 대한 해설서다. 저자는 고대 중국, 서아프리카, 중세 유럽, 혁명기의 프랑스, 개척기의 미국에 이어 현재까지 ‘측정의 역사’를 꼼꼼히 짚으며, 미터법이 국제단위계로 통합돼 ‘만물의 척도’가 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미터법이 등장한 것은 18세기 후반의 프랑스 혁명기다. 지금도 그렇지만 인류는 각양각색의 척도를 사용해왔다. 지역은 물론 시기에 따라서도 다 달랐다.

최초의 측정 도구는 ‘인체’였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는 ‘발’ 단위가 있었다. ‘손가락’ 굵기로 발 길이를 나누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발 길이를 ‘척’, 손가락 굵기를 ‘촌’이라고 했다. 12세기 영국 왕 헨리 1세는 ‘야드’를 도량형에 도입하면서 자기 팔 길이를 기준으로 삼았다는 속설도 전한다. 에티오피아에서는 귓구멍 크기로 약의 분량을 재며, 다이아몬드 크기를 나타내는 ‘캐럿’이 유래된 ‘캐럽’ 등 곡식과 열매도 훌륭한 척도로 쓰였다. 고대 산스크리트어로 된 《마누법전》은 금, 은, 구리를 사고팔 때 쓰는 척도의 비율을 묘사하면서 ‘먼지’ ‘서캐의 알’ ‘겨자씨’ ‘보리알’ ‘대마초씨’ 등을 등장시키고 있다. 척도는 위계와 질서의 표현이기도 했다.

중국 주나라는 궁중 제례의 예법을 표준화해 연주법과 음계를 구체적으로 규정하며 왕실의 권위를 과시했다. 궁정의 수(數)철학에 잘 들어맞은 ‘율려’, 즉 제례악의 12음계는 고대 편종의 소리를 기준으로 삼았다.

미터법은 1789년 7월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시작된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탄생했다. 지역마다, 도시마다 달랐던 도량형 통일의 필요성은 숱하게 제기됐지만 번번이 무산됐다. 영주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척도를 악용하며 농민을 수탈했다. 밑바닥에서는 ‘길도 하나요, 무게도 하나’란 분노의 목소리가 끓어오르던 참이었다. 도량형 개편은 혁명 세력에게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새 세계를 건설한다는 의지의 표현이며, 기계산업 발전과 대량생산 체제 등 자본주의 경제 출현의 기본 조건이기도 했다.

탈레랑의 안을 토대로 프랑스 아카데미가 완성한 도량형 개혁안은 루이 16세가 자유의 몸으로 처리한 마지막 업무였다. 아카데미는 ‘척도’를 뜻하는 그리스어 ‘메트론’에서 유래한 ‘미터’를 기본 길이 단위 명칭으로 정했다. 도량형 단위는 불변의 자연 표준에 연계했다. ‘초진자 길이’ ‘적도의 사분원 길이’ ‘파리를 지나는 사분 자오선’ 중 세 번째 안을 채택했다. 1799년 킬로그램 표준기 원본이 제작됐고, 미터를 국가 표준으로 한다는 법령도 공포됐다. 미터는 파리를 지나는 사분 자오선의 1000만분의 1로, 킬로그램은 물 1세제곱데시미터의 무게로 정의됐다.

미터법의 확산은 더뎠다. 프랑스에서도 반 세기 가까운 시간이 흐른 1840년에야 미터법이 발효됐다. 영국은 야드파운드법을 확립했고, 미국도 프랑스가 만든 미터법을 마뜩잖아 했다. 과학자들의 국제협력만큼은 끊이지 않았다. 제국주의 침략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의 토착문화가 초토화한 게 미터법 확산을 뒷받침했고, 이제는 거의 대부분의 나라가 미터법을 쓰는 데 이르렀다.

과학자들은 새로운 단위 표준을 찾고 있다. 해마다 20억분의 1씩 무게가 줄어든다는 킬로그램 원기처럼 인공물은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다.

저자는 “문화를 이해하려면 도량형을 이해해야만 한다”는 폴란드 경제학자 비톨트 쿨라의 말을 떠올리며 ‘우리 사회와 측정’의 관계를 정의한다.

“측정은 자나 저울 같은 개별 요소로 환원되는 일개 도구가 아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과 도구, 환경을 창조하고, 사람들이 행동하고 이해하는 방식을 결정한다. 세상과 그 형태에 매끄럽고도 밀접하게 얽혀 있는 유동적이고 일맥상통하는 체계다.”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