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의 인물] 손병희 "이번에 꼭 만세를 불러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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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문화의 가교 한경
손응구, 손규동, 이상헌, 소소거사, 의암…. 일제에 맞서 3·1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손병희 선생의 또 다른 이름들이다. 평생을 독립운동과 계몽운동에 몸바친 선생은 이름 개수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1861년 충북 청원군 청주목 서리의 서자로 태어난 그는 청소년 시절 신분을 비관,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교리에 매료돼 1882년 동학에 입문, 3년 만에 2대 교주 최시형의 수제자가 됐다. 탐관오리의 부정이 극에 달했던 1894년 전봉준과 함께 ‘혁명의 깃발’을 올렸지만 우금치 전투에서 크게 패했다. 그 길로 일본 망명길에 올랐다.
일본에서 신문물을 접한 선생은 계몽운동에 본격 나섰다. 일본에 있으면서도 동학 조직을 통해 국내 동학교도들에게 단발을 지시하는 등 신생활 캠페인을 벌였다. 동학 명칭이 천도교로 바뀐 이듬해인 1906년 귀국한 선생의 활동 영역은 더 넓어졌다. 1910년 천도교 산하의 출판사(보성사)를 만들고, 보성학교(현 고려대)와 동덕여학교(현 동덕여대) 등의 경영에도 참여했다.
1919년 2월27일 밤 독립선언문 2만1000여부는 보성사(서울 수송동)에서 인쇄됐다. 선생은 3월1일 만세운동 직후 일제에 검거돼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8개월간 복역했다.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상춘원(서울 창신동)에서 영면했다. 90년 전 오늘, 그의 나이 61세였다.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