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필에 날개가 달린 것 같다. 날카로운 부리도 보인다. 석양의 호숫가를 고요하게 바라보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새 꽃가지를 낚아챈다. 아직도 손동작이 젊은이처럼 민첩하다.

올해 상수(上壽·100세)를 맞은 윤중식 화백(사진). 70년의 화업을 통해 한국 근·현대미술의 대표 화가로 자리매김한 윤 화백은 “오늘도 붓질을 하면서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며 “내가 그림 속에 있는데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오”라고 말했다.

서울 성북동 자택 화실에서 지난 1일 만난 그는 여전히 ‘작업 중’이었다. 요즘 어느 때보다 ‘미술 인생’에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3일부터 서울 성북구립미술관에서 국내 최고 원로 화가로 ‘상수전’을 펼치기 때문이다.

2000년 갤러리 현대 개인전 이후 “작품이 한발 더 나아가면 보여주겠다”며 전시회를 미뤄온 노화백의 12년 만의 작품전이다. 평생의 화업을 ‘정성의 산물’로 규정하는 그에게 그림은 석공이 돌을 쪼듯 아름다움을 새기는 작업이다.

“100세까지 그림에 매달리고 있는 것은 희망을 놓고 싶지 않기 때문이에요.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데 대충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옳은 것을 실행에 옮기는 의지죠.”

그는 “화가는 그림만 잘 그리는 게 아니라 문화와 시대정신을 작품에 어떻게 승화시켜 내는지 알아야 한다”며 “이번 개인전은 정신없이 작업에 매달렸던 작품을 모은 전시일 뿐 회고전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화가로서 저는 행운아입니다. 근대와 현대의 가교 역할을 화단에서 했어요. 새로운 화법과 호흡하며 젊음을 배우려고 애썼고요. 화가는 항상 젊어야 하는데 상수 이후 오래도록 젊은 생각을 간직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그는 최고령 작가가 되는 만큼 다시 태어나는 심정으로 새로 시작하겠다며 “현역으로 봐달라”고 말했다. 사람 만나는 것을 싫어하고 그림이 바깥에 나가는 걸 꺼리는 그는 그림을 자기 분신으로 여긴다. 그래서 생활이 어려워져도 좀처럼 내다 팔지 않는다. 그의 ‘낯가림’에는 이산의 아픔도 한몫했다. 1·4 후퇴 때 노모를 두고 남으로 향하던 그는 사리원 근처에서 아내와 딸을 놓치고 말았다. 돌도 안 된 둘째아들마저 부산 피난처에서 잃었다. 여섯살배기 아들과 단 둘이 고난의 타향살이를 시작했다.

“1950년대 말 수근(박수근)과 창신동 술집에서 아들을 옆에 앉혀두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던 게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중섭(이중섭)이는 부산에서 만났어요. 부산 부두에서 일본으로 떠나려고 선장하고 얘기하며 가다가 그냥 도로 오더군요. 애들 때문에… 그거 참. 최영림 임직순 박고석 황유업 도상봉 등과 종묘 뒷골목에서 술도 많이 마셨지요. 그땐 통금이 있었으니까 후다닥 마시고 들어갔어요.”

‘100세 현역’의 건강 비법이 궁금했다. 그는 “늙어서도 작업할 수 있는 것은 잠을 많이 잤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하루 10시간 이상 자고, 휴일에는 하루 종일 자기도 한다고 했다. 하루 5시간 작업하면서 클래식 음악을 듣고, 소식하며 요가를 꾸준히 하는 것도 도움이 된 것 같다.

“50여년 살아온 성북동 꼭대기 집에서 라디오로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작업해요. 바흐, 모차르트, 하이든의 선율이 참 아름답죠. 그림과 음악에서 나오는 ‘행복 바이러스’가 저를 지탱해준다고 생각해요.” 음식은 국수, 생선전, 돼지고기 편육을 즐긴다고 했다. “원래 이북사람들의 식탁에는 고기가 잘 떨어지지 않아요. 생선 중에는 조기와 고등어 구이를 잘 먹습니다. 육식이든 채식이든 중요한 건 소식이에요.”

내달 3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에서는 1970~80년대 작품과 2000년 이후 제작한 미공개 신작 등 유화 70여점을 만날 수 있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