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익~.’ 코앞에 자전거 한 대가 멈춰 섰다. 만나기로 한 사람이 어디서 오는지 몰라 멀찍이 시선을 두고 있던 터라 흠칫 놀랐다. “안녕하세요?” 가까이서 들려오는 맑고 가벼운 목소리. 얼굴은 중년이지만 음성은 소년 같다. 자전거를 탄 날쌘 등장도 그랬다. 9년 만에 장편 《위풍당당》을 들고 나타난 소설가 성석제 씨(52)다.

성씨는 많은 작품으로 필명을 드날린 작가이자 국내는 물론 전 세계에서 맛본 음식을 특유의 입담으로 소개해온 음식 이야기꾼이다. ‘맛있는 만남’을 제안하자 “어느 집에서 할지 고민해 보겠다”던 그의 답신은 의외였다. 동교동에 있는 비빔밥집 ‘비빔밥연구소’. 주택가에 자리한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소박한 음식점이다.

이 음식점은 진주식 비빔밥을 전문으로 하는 집이다. 전북 전주가 아니라 경남 진주다. 진주비빔밥의 별칭은 ‘칠보화반(七寶花飯)’. 황색의 놋그릇, 흰색의 밥, 다섯 가지 색의 나물이 어우러져 일곱 빛깔 꽃모양을 띤다는 의미다. 사골 국물로 밥을 지어 밥알이 짭조름하다. 맨밥과 반찬만 먹어도 별미일 듯싶다.

“비빔밥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제삿밥에서 유래했다는 게 통설이에요. 제사 지내고 여러 음식과 반찬을 한꺼번에 비벼서 나눠먹는 거죠. 그래서 양반문화가 발달한 진주도 비빔밥으로 유명합니다. 작업실이 이 집에서 자전거로 5분 거리여서 가끔 찾습니다. 특별한 날이니 저는 나물비빔밥 ‘특’으로 하죠.”

나물비빔밥과 육회비빔밥, 석쇠불고기를 시켰다. 주당으로 유명한 그와 밥을 먹는데 막걸리가 빠질 수 없다. 간단히 한잔 곁들이기로 했다.

▷자전거를 타고 오셨습니다.

“자전거는 가장 친인간적인 도구예요. 하루에 한두 시간쯤 탔는데 요즘 들어서는 더 많이 타요. 덕분에 몸도 훨씬 건강해졌죠. 자전거 타기는 운동 효과 외에도 정신적인 재충전을 해줘서 건강에 좋은 것 같습니다. 차비가 들지 않으니 경제적이고요. 요샌 날씨가 좋아서 자전거를 타고 나가 밖에서 글을 써요. 양화대교 중간에 카페가 있는데 거기서 매일 한두 시간 글 쓰는 게 요즘 일과예요.”

▷서울 시내에선 자동차가 많아 자전거 타기가 위험할 것 같은데요.

“위험하죠. 서울엔 자전거 전용도로가 거의 없고 그나마 있는 곳도 자동차가 불법점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도 근래엔 자전거에 대한 인식이 많이 좋아졌어요. 특히 운전자들이 예전처럼 자전거 타는 사람들을 ‘다른 종족’처럼 여기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신작 이야기를 꺼냈다. 《위풍당당》은 상처받은 착한 사람들이 자신의 ‘선택’으로 가족을 형성하고 외부의 적으로부터 그것을 지켜 나가는 이야기를 담았다.

▷9년 만의 장편이 가족 이야기인데 이유가 있습니까.

“가족의 의미가 자연스럽게 변하는 것 같았어요. 혈연으로서의 가족은 퇴색하고 선택에 의한 가족이 늘어가고 있죠. 그런데 전통적 가족의 이름으로는 서로 괴롭히고 억압하는 현상들이 많아요. 아버지는 왜 공부 안 하고 게임만 하느냐고 아들을 꾸짖고, 아들은 왜 아버지는 부자가 아니냐고 원망하지요. 반면 다른 쪽에서는 혈연이 아니어도 친형제보다 더 진한, 오누이와 모녀 이상으로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이 선택한 가족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아직까지 가족은 혈연관계라는 인식이 많은데요.

“혈연관계라고 해서 계속 억압의 형태로 가다가는 점차 해체될 수밖에 없어요. 새로운 정의가 나와야 합니다. 자식은 무조건 아버지 말에 따라야 한다, 아버지는 술 먹고 놀아도 된다는 식의 논리를 계속 강요할 순 없죠. 심지어 아들이 엄마를 살해하고 시신을 방치하는 등 병리적인 현상이 적잖게 일어나잖아요. 주류는 아니지만, 선택에 의한 가족들이 서로 부족한 부분과 상처를 쓰다듬는 걸 보면 즐거워요. 그런 가족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집에서는 어떤 아버지인지 궁금합니다.

“애들하고는 사이가 좋아요. 때린 적도, 폭언을 한 적도 없습니다. 저도 부모와 스승을 잘 만나 한 번도 맞은 적이 없고요. 맞을 뻔한 적은 있지만 제가 도망갔죠. 아버지가 환갑 되던 해에 돌아가셨는데 친구들이 와서 ‘아버지계의 전설’이 돌아가셨다고 했어요. 점잖고 자애로운 분이셨죠. 저도 아버지로부터 배운 게 아닌가 싶은데 저만의 생각일까요?”

음식이 나왔다. 그는 젓가락을 들면서 말했다. “젓가락으로 비비는 건 아시죠?” 밥을 젓가락으로 비빈다고? 뜨악한 표정을 읽은 그가 설명했다. “예전에 직장 다닐 때(그는 동양그룹에서 1993년까지 6년가량 일했다.) 얄미운 상사가 있었어요. 그 사람이 점심시간에 좀 늦게 왔기에 놀려주려고 원래 비빔밥은 젓가락으로 비비는 거라고 속였어요. 그런데 그 상사가 제일 빨리 비벼서 먹는 거예요, 하하. 그 후 전주에 갔더니 다들 젓가락으로 비비고 있더라고요.”

▷요즘 직장인들은 분노와 짜증을 풀 곳이 없다고들 합니다만.

“예전엔 통제가 느슨했다고 할까, 다들 뭘 잘 몰랐기 때문에 자유로운 면이 있었어요. 제가 사내 바둑동호회에 들었는데 예산 지원이 너무 많아서 돈 쓰기에 바빴어요. 지금은 그런 게 전혀 없고 빠듯하죠. 감시도 심하고. 각자 알아서 사는 시대예요.”

▷‘함께하는 문화’가 없다고 한탄하는 사람도 많은데요.

“꼭 부정적으로만 볼 건 아닌 것 같아요. 여럿이 해서 좋은 것도 있고, 혼자해서 좋은 것도 있죠. 전에 혼자 주말에 비디오를 30개쯤 빌려다 눈이 벌게지도록 보고 출근하기도 했어요. 그러면 또 1주일 잘 살아요. 지금도 자전거, 사진, 음악 등 혼자 하기 좋은 취미는 많잖아요. 함께하는 문화도 없지 않습니다. 한번은 산책하다 광명의 어떤 체육관을 우연히 들어가 봤는데, 엄청난 열기와 함성에 놀랐어요. 경기 남부지구 아마추어 탁구대회였는데 다들 스카이 서브를 넣더라고요. 프로 뺨치는 수준이었죠. 물어보니 일 마치고 오후 8시부터 새벽 1시까지 연습한대요. 다음날 쉬는 것도 아니거든요. 건강한 거죠. 괜찮을 거예요.”

비빔밥은 한마디로 담백했다. 일단 고추장 맛이 아주 옅었다. 가게를 운영하는 박경주 ‘소장’에게 물으니 고추장을 한 달에 한 번 직접 담그는데 짜지 않도록 신경을 쓴다고 했다. 고추장이 튀지 않으니 나물이 향기롭다. 나물은 간장으로 약하게 간을 하는데 각각 간이 돼 있는 고추장과 나물, 밥이 모여 이루는 조화가 오묘하다.

성씨의 고향은 경북 상주다. 피폐해진 농촌과 자연에 대해 많이 쓴 것은 그곳에서 보낸 어린 시절 덕분이다. 이번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사람이 살려면 어느 정도의 자연 훼손은 불가피하지만 지금은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의 파괴가 이뤄지고 있다며 조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뭐가 문제일까요.

“요즘은 전국이 다 똑같아서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어요. 예전엔 이곳은 어디쯤이겠구나, 산이 많구나, 들이 넓구나 하는 느낌이 있었는데 지금은 똑같이 아파트뿐이죠. 무분별한 개발을 통해 누가 이익을 봤는지…. 개발 방향은 물론 개발로 인한 이익을 공평하게 나눠갖지 못한 것도 문제라고 봐요.”

▷정치의 계절인데 한쪽에서는 양극화를 지적하고 다른 쪽에선 복지 포퓰리즘을 경계합니다.

“우리뿐 아니라 전 지구적으로 지금처럼 양극화가 심해진 적이 없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지금 굶는 사람이 8억명, 기초대사량 이하로 먹는 사람이 10억명이라는데 비만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도 많죠. 생산되는 식량의 절반을 동물이 먹고 그 동물을 다시 일부 선진국 사람들이 먹으니 그래요. 이런 구조를 바꾸려면 시민이 각성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사회로 한정해서 보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뜸을 들이다) 소설가로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소설가는 ‘이렇게 가야 한다’고 직접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소설 속에 들어 있는 인물, 이야기를 통해 말하는 거죠.”

▷소설가는 사회적 발언을 하면 안 된다는 건가요.

“대놓고 직접 하는 건 아니라고 봐요. 저도 가끔은 작가 아닌 자연인으로서 발언하고 칼럼도 쓰지만, 그래도 에두르고 비유를 하게 되죠.”

▷최근 소설가들이 SNS를 통해 사회적 발언을 많이 하는데요.

“저하고는 맞지 않아요.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서 소통하는 언어는 언뜻 보면 문장 같지만 사실은 ‘말’이죠. 문장은 시간을 들여 사고한 끝에 나오는 것이고, 말은 감각적이고 즉흥적입니다. 저는 느릿느릿 오래 생각하는 사람이어서 SNS처럼 말의 빠른 왕복에는 익숙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말들을 문장으로 오해해서 흥분합니다.”

▷이런 시대에 문학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첫째, 말은 휘발돼서 날아가지만 문장은 남게 돼 있습니다.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수천년간 인용돼요. 괴테, 장자 같은 사람들이 말만 했다면 우리가 인용할 수 없었겠죠. 결국 오래 가는 건 문장입니다. 그렇다면 꾸준히 글을 쓰는 게 보람 없는 일은 아닐 거예요. 둘째, 글은 말이 줄 수 없는 창작의 희열을 줘요. 성취감이죠. 말 잘하는 사람들은 집에 가서 자기 전에 굉장히 허무할 것 같아요. 말은 사람을 맥 빠지게 하고 허무하게 할 때도 많거든요. 그러나 문장은 빠져나간 걸 채워주고 존재를 고양시켜 주지요. 아, 그런데 제가 왜 이렇게 열을 내서 떠들고 있죠? 말을 너무 많이 하고 있네요, 하하.”

▷《도가니》《부러진 화살》처럼 사회적 관심과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소설이 늘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문학이 살아났다고 봐도 될까요.

“문학이 죽었다면 200년 전부터 죽었겠죠. 그런데 아직 저 같은 사람도 붙어 있잖아요. 문학 안 죽었어요, 하하. 소설은 지금 세태를 그대로 반영해서 현실을 변화시킬 수도 있지만 또 다른 길도 있어요. 오래 생각해서 좀 더 보편적인 것에 관해 쓰려는 사람도 있죠. 영화 한 편 때문에 문학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고 하나요? 그건 아닐 것 같아요.”

막걸리를 반주(飯酒) 삼아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밥그릇이 깨끗하게 비워졌다. 석쇠불고기도 몇 점 남지 않았다. 그는 자주 농담을 섞어 이야기했다. 하지만 농담 때문에 말이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외려 더 풍성해졌다. 몇 잔의 반주가 만남을 유쾌하게 해주듯 촌철살인의 농담이 이야기를 더욱 매끄럽고 깊이있게 만들었다. 명랑과 재치의 아이콘으로 널리 알려진 그는 사실 말을 아끼면서도 할 말은 다하는 ‘묵직한’ 작가였다.


◆ 소설가 성석제의 단골집 비빔밥연구소
진주식 육회비빔밥…데친 채소에 국간장 넣어 맛 내

서울 동교동에 있는 비빔밥연구소는 진주식 육회비빔밥 전문점이다. 진주비빔밥은 전주, 해주와 함께 3대 비빔밥으로 꼽힌다. 진주는 옛날부터 대규모 우시장이 있던 곳이어서 품질 좋은 소고기를 구하기 쉬웠다. 이 집은 진주 출신 시어머니의 손맛을 물려받은 며느리가 운영한다. 고춧가루 참기름 들기름 해초류를 진주에서 가져와 주인이 고추장과 간장을 담근다. 인공 조미료는 쓰지 않는다. 사골 국물로 지은 밥에 계절 나물과 신선한 육회를 얹고 마늘, 소고기, 홍합 간 것을 자작하게 끓인 탕과 함께 나오는 육회비빔밥(8000원)이 주 메뉴다. 고명으론 고사리 호박 숙주 무나물 얼갈이배추 해초 콩나물이 오른다. 채소는 볶지 않고 데친 다음 직접 담근 국간장으로만 맛을 낸다.

소고기국밥(6000원)도 인기 메뉴다. 양지와 내장으로 국물을 내 무, 콩나물, 고사리를 듬뿍 넣고 끓인다. 서울 동교동 204의 5. (02)323-0480

박한신/김인선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