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빛 도는 붉은 ‘쩨디(불탑)’를 새파란 하늘이 감싼다. 따가운 햇살에 눈을 잔뜩 찌푸린 채 쩨디 끝을 올려다본다. 선명한 색채 대비가 눈이 시릴 정도다. 푹푹 찌는 더위를 식히기에는 강 바람도 역부족이다. 방콕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 남짓 걸려 도착한 아유타야. 차오프라야강 하류에 전개된 삼각주 위에 발달한 아유타야는 타이족이 남하하면서 1350년 건설한 도시. 400여년간 아유타야 왕조의 수도로 번성하다 1767년 미얀마의 침입으로 파괴됐다. 지난해 대홍수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보수와 복원공사를 통해 고색창연한 옛 모습을 되찾았다.

◆아픈 부처가 많은 아유타야

더위를 뚫고 도성의 중심 사원인 왓 마하탓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붉은 벽돌 담은 무너져 내렸고, 불상도 온전한 게 하나도 없다. 미얀마와의 전쟁 상흔이 사원 곳곳에 남아 있다. 머리를 잃은 불상이 즐비하다. 가부좌를 튼 다리만 남아 있기도 하다. 불에 그을린 모습 그대로인 듯 거무튀튀한 불상을 보니 괜히 으스스하다.

그늘을 찾아 보리수나무 근처로 걸어간다. 웅성거리는 소리를 따라 눈을 돌리니 나무 밑동에 부처의 머리가 보인다. 본래 나무와 한 몸인 양 뿌리와 얽혀 있다. 참혹했던 과거는 불상의 온화한 미소로 가려진 지 오래다. 이 독특한 불상의 사진을 찍는 이들의 자세가 엉거주춤하다. 불상 앞에서는 그 머리 높이보다 몸을 낮춰 예를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가장 유명한 부처라서 자리싸움도 치열하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쪼그려 앉아 겨우 한 장을 찍었다.

아유타야는 사원을 빼놓을 수 없다. 가장 번성했던 왕조가 있던 곳이라 사원이 1000개나 있다고 한다. 가장 크고 대표적인 곳이 왕실 전용으로 지은 왓 프라시산펫 사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세 개의 쩨디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 본디 금을 입힌 황금 탑이었지만 지금은 우중충한 회색빛이다. 미얀마군이 불태워 금을 가져가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 하지만 그 높이와 규모만큼은 당시의 위용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사원에서 엿본 깊은 불심

태국인의 90%는 불교를 믿는다. 사원에서 불공을 드리는 것은 매우 일상적인 일이다. 엄마 손을 잡고 온 아이나 교복을 입고 삼삼오오 찾아온 학생들은 물론 말끔하게 차려입은 청년들도 쉽게 볼 수 있다.

연인과 함께 오면 헤어진다는 속설이 있는 왓 몽콘 보핏도 꽃이나 향을 든 태국인들이 끊임없이 찾아오는 곳. 왓 프라시산펫에 있던 불상을 다시 만들어 놓았는데 다른 사원과 달리 거대한 삼각형처럼 생겼다. 신발을 벗고 법당에 들어서면 키가 12m에 이르는 불상이 반겨준다. 오른편에는 엄지손톱만한 금박지를 빼곡하게 붙인 불상들이 줄지어 있다. 원래는 청동불이지만 금불상처럼 바뀌었다. 태국인들은 직접 가져오거나 사원에서 파는 5바트짜리 금박지를 불상에 붙이며 불공을 드리기 때문이다.

◆무에타이 전사들이 모이는 곳

허벅지만한 팔뚝에 문신을 새긴 무에타이 선수들로 북적이는 아침이다. 아유타야에선 해마다 3월이면 세계 무에타이 페스티벌이 열린다. 붉은 옷을 입은 선수들이 나이 카놈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에 정신이 없다. 나이 카놈은 무에타이로 미얀마군 9명을 혼자 물리친 태국의 역사적인 영웅이다. 그를 기리고 무술 실력을 뽐내기 위해 올해도 49개국에서 555명의 선수들이 아유타야를 찾았다.

빠르고 낮은 북소리와 귀를 찌르는 피리소리가 섞인 전통음악이 흐른다. 아유타야 관광센터에서 무에타이 프로선수들의 경기가 진행됐다. 선수들은 바로 대결을 시작하지 않는다. 자신의 스승에게 예를 표하고 승리를 비는 ‘와이크루’라는 의식을 먼저한다. 처음 보기에는 이상한 스트레칭 같아 난감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엄숙하게 절을 하고 자세를 잡는 모습을 보다 보면 이내 마음이 경건해진다. 상대방에 대한 살기로 시작하는 여느 경기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고 한 선수의 발이 상대방의 갈비뼈에 강하게 꽂힌다. 맨살이 부딪히며 ‘퍽’하는 둔탁한 소리가 울린다. 사방으로 튀는 땀방울이 햇빛에 반짝인다. 화려한 발차기 기술이 계속 돼 카메라를 꺼내려 한눈을 팔았더니 어느새 링 바닥에 한 명이 쓰러져 있다.

저녁에는 왓 마하탓을 배경으로 나래수안 수에아 등 태국 왕에게 제사를 드린다. 제사와 전통무용이 끝나면 선수들은 몽콘을 수여받는다. 몽콘은 실타래를 두껍게 꼬아 만든 신성한 머리띠다. 안전을 기원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몽콘을 쓴 선수들이 자신의 무에타이 스승에게 찾아가 인사를 한다. 의식이 끝나면 스승 앞에서 와이크루를 선보인다. 선수들이 만들어낸 거대한 붉은 물결이 실루엣만 드러낸 왓 마하탓과 어우러진다. 수마와 전쟁이 할퀴고 가기 전의 평온한 아유타야에 서 있는 듯하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체온을 웃도는 더위를 씻어준다.

■ 여행팁

타논나레 쑤언 오른쪽 끝자락에는 재래시장 딸랏 차오 프롬이 있다. 생필품도 함께 팔기 때문에 현지인들이 많이 찾는다. 야시장에서는 양꿍, 팟타이 등 다양한 태국 음식을 맛볼 수 있다. 곳곳에서 팔고 있는 양꿍의 국물 맛이 일품이다. 양꿍 국물은 얼큰하면서도 신맛이 강하다. 세계 3대 스프 중 하나인 양꿍은 매운맛, 신맛, 단맛, 짠맛, 쓴맛 등 다섯 가지 맛을 모두 선사한다.

태국식 볶음 면인 팟타이를 즉석에서 만들어 주는 노점도 많다. 철판 주변에 쌀국수와 숙주 등 재료를 산처럼 쌓아놓고 만든다. 팟타이는 돼지고기 새우 등 넣는 재료에 따라서 끝에 붙는 이름이 달라진다. 쫄깃한 면발에 고명으로 올라온 땅콩가루의 고소한 맛이 입맛을 돋운다.

샐러드인 쏨땀도 대표적인 태국 요리 중 하나다. 익기 전의 파파야를 채로 썰고 땅콩, 토마토, 라임, 고추 등과 함께 버무려 만든다. 아삭한 파파야의 식감과 함께 새콤달콤하면서도 약간 매운맛이 입안에 퍼진다. 태국 요리에는 대부분 강한 향을 가진 팍치(고수)가 들어간다. 냄새가 싫다면 ‘마이 싸이 팍치’라고 하면 된다.

아유타야=정소라 기자 iam5ou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