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타자동차와 혼다자동차는 일본 자동차산업을 대표하는 기업이자 오랜 경쟁자다. 도요타 창업주 도요다 기이치로와 혼다 설립자 혼다 소이치로는 일본 자동차산업을 키워낸 ‘1등공신’들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시작부터 끝까지 완전히 달랐다. 기이치로가 선친의 유언에 따라 자동차를 개발한 반면 소이치로는 자동차의 매력에 푹 빠져 맨주먹으로 창업했다. 기이치로가 품질과 생산방식을 끊임없이 개선해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면 소이치로는 기술력으로 승부를 걸어 성공했다. 기이치로는 뇌출혈로 쓰러져 갑작스런 죽음을 맞았지만 소이치로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명예로운 퇴진을 택했다. 도요타가 세습경영을 한 것과 달리 혼다는 자식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았다. 이렇듯 서로 다른 경영 방식과 기업 문화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추구한 장인정신은 일본 자동차산업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원동력이 됐다.

◆선친 유지 받들어 자동차 국산화

도요타자동차 탄생에는 도요다 기이치로의 아버지 도요다 사키치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키치는 1876년 일본 시즈오카현의 시골마을 야마구치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남인 사키치는 가업을 이어야 했지만 기계에 관심이 많았고 발명가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사키치가 주목한 것은 어머니가 항상 사용하던 베틀이었다. 쓰기 편한 직기를 만들겠다고 결심한 사키치는 연구에 몰두해 1894년 신제품을 만들어낸다. 두 손으로 사용하던 베틀을 한 손으로도 작동할 수 있게 만든 첫 발명품 ‘도요다식 목제인력직기’를 내놓은 것. 기존 베틀에 비해 생산성이 두 배나 뛰어났다.

이후 1924년 대표적 베틀인 ‘G형 자동직기’를 내놓은 사키치는 1926년 도요다자동직기제작소를 설립했지만 4년 뒤인 1930년 사망했다. 사키치는 1920년대 사업을 위해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자동차가 새로운 산업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는 죽기 전 ‘G형 자동직기’ 특허권을 영국 회사에 팔아 100만엔을 손에 넣었다. 사키치는 죽기 전 아들 기이치로에게 자금을 물려주며 유언을 남긴다. “이 돈으로 반드시 국산 자동차를 만들어야 한다.”


기이치로는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미국 출장길에 오른다. 포드와 제너럴모터스(GM) 공장과 부품라인을 돌아본 그는 귀국해 도요다자동직기제작소에 ‘자동차사업부’를 만든다. 쉐보레 자동차 한 대를 구입해 연구하면서 자동차 개발에 들어간다. 당시 자동차사업부 직원은 10여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들은 사키치가 세상을 떠난 지 4년 만인 1934년 도요다 프로토타입 엔진 개발에 성공한다. 이듬해 5월 프로토타입 승용차 모델 A1을 내놓고 1936년 승용차 판매를 시작한다.

◆맨 주먹으로 일으킨 혼다자동차

아버지가 물려준 유산과 유언으로 자동차 사업에 뛰어든 기이치로와 달리 소이치로는 맨손으로 사업을 일으켰다. 1906년 일본 시즈오카현 근처의 작은 마을 하마마쓰에서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소이치로는 6살 때 마을 어귀에서 포드의 ‘모델T’를 본 뒤 자동차에 빠져든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철공소에서 자동차 수리업을 겸업하던 그는 자동차 정비 종업원을 모집한다는 구인광고 전단지를 보고 홀로 도쿄의 ‘아트상회’로 향한다. 허드렛일을 하며 어깨 너머로 정비기술을 배우다 정식 정비공이 됐다. 6년 후인 1928년(22세)에는 고향에 ‘아트상회 하마마쓰 지점’을 연다. 이 정비소는 3년 후 종업원 50명의 하마마쓰 최대 규모 정비공장으로 성장한다.

정비사업으로 자리를 잡은 소이치로는 자동차 레이서에 도전했다가 도쿄에서 열린 대회에서 사고로 큰 부상을 당한다. 18개월간 병원 신세를 지게 된 그는 레이서의 꿈을 접는 대신 엔지니어의 길을 선택했다. 소이치로와 도요타의 인연이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다. 1937년 ‘동해정기중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피스톤링을 만들던 그는 대량생산에 성공하면서 도요타에 납품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공장을 도요타에 팔아버린 그는 1946년 10월 혼다자동차의 모태인 ‘혼다기술연구소’를 설립한다. ‘바타바타’ 엔진을 개발, 모터사이클로 이름을 알린 혼다는 1962년 처음으로 스포츠카 ‘S300’ ‘S360’ 등 S시리즈 자동차를 만들게 된다. 도요타에 비해 늦은 출발이었지만 인기는 대단했다. 엔진성능은 물론 디자인이 세계적인 스포츠카와 비교할 만한 수준이었다. 혼다는 이어 경·소형차를 내놓고 세계적인 모터사이클 경주에서 우승컵을 거머쥐며 이 분야의 독보적인 기업이 된다.

◆도요타 ‘가이젠’ vs 혼다 ‘와이가야’

두 기업인의 경영 아래 도요타와 혼다는 성장가도를 달린다. 기이치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G1형 트럭을 생산하다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전쟁이 끝나자 다시 승용차 개발에 나선다. 대중적인 소형 승용차 시대가 올 것으로 내다본 것이다. 도요타는 1947년 독자 개발한 ‘S형 엔진’을 내놓는다. 4기통 1000㏄짜리로 소형, 경량, 고연비를 실현시킨 것이 특징이었다. 도요타는 이 엔진을 장착한 ‘도요페트 SA’를 출시한다. 기이치로는 자동차 품질과 생산시스템 개선을 끊임없이 시도했다. 도요타의 ‘가이젠(改善)’ 문화는 이런 기이치로의 영향 덕분에 만들어졌다. 기이치로는 조립라인에서 부품을 어떻게 이동시킬 것인지, 한 작업에 얼마나 많은 인원이 필요한지 연구하고 생산라인에 반영했다. 이는 도요타 생산방식의 근간인 ‘JIT(just in time·적기 생산)’의 시초가 됐다. 제조업체가 부품업체로부터 부품을 필요한 시기에 수량만큼만 공급받아 재고가 없도록 해주는 시스템이다. JIT는 이후 수십년간 도요타 성장의 원동력이 됐고 많은 자동차회사들이 이를 벤치마킹했다.

도요타가 품질과 생산방식 부문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면 혼다는 ‘기술의 혼다’로 불릴 만큼 높은 기술력으로 이름을 알렸다. 혼다의 기업문화 중에 유명한 것이 ‘와이가야’다. ‘시끌벅적하게 떠든다’는 일본말 의성어다. 혼다에는 사무실이든 현장이든 어디에서나 사람들이 모여서 떠들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소이치로가 토론을 해야 직원들 간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창조적 인물이 나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기업문화를 바탕으로 1980년대 중반 개발된 중형 세단 ‘어코드’는 미국 시장을 점령, 현지 언론들이 ‘제2의 진주만 기습’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혼다는 세습경영을 하고 있는 도요타와 달리 혈통이나 인맥 등을 철저하게 배제했다. 소이치로는 세습경영을 거부하고 친인척은 물론 자식들에게조차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았다. 그는 늘 현장 현물 현실을 뜻하는 ‘삼현주의(三現主義)’를 강조했다.

◆갑작스러운 죽음과 아름다운 퇴진

1945년 이후 급격한 인플레이션과 각지에서 벌어진 노동운동은 도요타에도 충격을 줬다. 경영위기를 맞은 도요타는 대규모 인원감축을 조건으로 간신히 은행융자를 받게 된다. 도요타는 유례없는 파업사태를 맞았고 기이치로는 사태수습을 위해 책임을 지고 사장자리에서 물러난다. 이후 한국전쟁을 계기로 일본경제는 급속한 성장세로 돌아섰고 도요타도 회생했다. 기이치로는 1952년 7월 사장으로 복귀할 예정이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재취임 4개월 전인 3월27일 뇌출혈로 갑자기 쓰러진 후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향년 58세였다.

갑작스럽게 사망한 기이치로와 달리 소이치로는 오랜 기간 최고경영자 자리에서 혼다의 발전을 주도했다. 일본에서 자동차를 처음 만든 사람은 기이치로지만 동양인 중 처음으로 미국 자동차 명예의 전당에 오른 인물은 소이치로다. 소이치로는 끊임없이 제품의 기술력을 높이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중대한 판단 실수를 저지른다. 혼다가 승용차 메이커로 알려진 것은 1972년 ‘시빅’을 내놓으면서부터다. 실용성이 높고 연료가 적게 드는 수냉식 엔진을 얹은 이 차는 전 세계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소이치로는 이때 퇴임을 결심한다. 그가 공랭식 엔진을 고집했었기 때문이다. 시대의 변화를 감지한 소이치로는 1973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다. 그는 1991년 지병인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소이치로가 사망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그의 퇴임사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된다. “내게 주어진 시간의 99%를 실패하는 일에 쓴다.”

최진석 기자 isk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