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000년께 이집트인들은 석류 씨를 피임약으로 사용했다. 석류 씨에 들어있는 에스트로겐 성분이 배란을 억제해 임신 가능성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경제전문지 포천은 20세기 최고 발명품으로 원자폭탄과 우주왕복선 대신 피임약을 선정했다. 임신의 공포에서 자유로워진 여성들의 사회 참여가 늘면서 전통적인 가족 구조가 변했으며 자연히 세상도 변하게 됐다는 데 주목한 것이다.

《사물의 민낯》은 이처럼 당연해보이는 우리 주변 물건들의 역사와 사연을 소개한 책이다. 일상적으로 쓰이는 용품의 초기 모습과 변천 과정, 에피소드 등 ‘현재 삶의 표준’이 되기까지의 여정을 담았다. 콘텐츠 창작 전문 집단인 갈릴레오 SNC 대표인 저자 김지룡 씨는 잔잔한 목소리로 주변 사물들의 역사를 통해 인류 문화사를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예컨대 엘리베이터는 현대사회를 만들어 낸 핵심 키워드다. 돈을 벌기 위해 끊임없이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은 엘리베이터의 발전 덕분이었다. 한정된 토지의 한계를 극복한 고층 건물이 엘리베이터 덕에 가능했다는 설명이다.

식탁에 차려진 포크의 역사도 흥미롭다. 11세기까지는 유럽에 포크가 없었다. 자급자족 형태의 경제 생활을 하던 유럽인들에게 포크를 사용해야 할 음식이 없었던 것. 묽은 죽과 빵은 숟가락과 손으로 먹으면 그만이었다. 조금씩 동방의 문물을 받아들이던 11세기 이후에야 이탈리아에서 포크가 등장했다. 이후 포크는 기독교인들로부터 ‘악마의 무기’라는 공격을 받는다. 음식을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신의 은총을 빼앗았다는 것. 포크는 마녀가 만들어낸 도구이자 이교도 신의 삼지창으로까지 여겨졌다.

그러나 위생 개념의 발달과 함께 포크는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포크를 담는 통이 상류계층에서 유행하기도 했다. 보석과 진주 등으로 포크를 치장하는 게 귀족들의 놀이가 될 정도였고 산업혁명으로 철 생산이 증가하면서 일반 대중의 식기로 자리를 잡았다.

게임기의 발명은 핵무기의 그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핵무기 개발을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심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위협용으로 생각했던 핵무기가 실전에 투입돼 20만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다.

당시 이 프로젝트의 전자부문 주임이었던 윌리 비긴보섬 박사 역시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군사적으로 쓰이던 컴퓨터를 놀이 목적으로 쓸 수는 없을까 고민했다. 1958년, 그는 두 개의 막대와 하나의 공이 움직이는 단순한 테니스 게임을 개발했다. 그는 이 게임에 대해 일체의 특허 등록을 하지 않았고 이후의 프로그래머들은 그의 뒤를 이어 획기적인 게임을 개발해냈다.

이 외에도 책에는 바다표범과 순록의 생명을 ‘구한’ 비아그라, 퇴폐의 상징에서 현대사회의 상징으로 발전한 넥타이, 낙심한 요리사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섞어 만든 소스인 마요네즈, 자위 행위 예방을 위한 간식인 콘플레이크, 이름도 없이 사라질 뻔 했으나 보는 사람과 감정을 공유하면서 세계적인 캐릭터가 된 헬로키티 등 49개 사물의 역사가 담겨 있다.

하나의 사물은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시대적 상황과 갖가지 사회현상, 여러 인물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역사’다. 사물을 이해하면 인류 역사를 엿볼 수 있다는 이 책의 메시지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던 주변의 사물을 새삼 다시 보게 만든다.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