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아들’ 이종범(42·사진)이 데뷔 20주년을 맞은 올 시즌 개막을 1주일 앞두고 전격 은퇴를 선언했다. ‘국보급 투수’ 선동열 감독(49)이 KIA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후배들과 경쟁하며 꿋꿋이 자리를 지켜왔던 이종범이 은퇴하자 둘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이종범은 지난달 31일 저녁 7시께 갑작스레 은퇴를 선언했다. 올 시즌 시범경기에서 일곱 번 출장해 타율 0.333(12타수 4안타)로 나쁘지 않았는데도 은퇴를 결정했다.

원인은 구단의 ‘사실상 은퇴 권유’로 보인다. 이종범은 지난달 29일 대구에서 삼성과 시범경기를 마친 뒤 이순철 수석코치로부터 “개막 엔트리에서 제외될 것이다. 시즌 동안 2군을 오가야 되는데 괜찮겠느냐”는 얘기를 들었다. 완곡한 표현이었지만 사실상 은퇴를 권유받은 것이었다. 이종범은 지난달 30일 광주로 돌아와 아내와 상의했다.

이종범은 지난달 31일 오전 광주에서 한화와 시범경기 전 선 감독을 찾았다. 선 감독은 “실력으로 후배들과 경쟁이 쉽지 않을 것 같다”고 했고, 이종범은 “차라리 마무리 훈련 때 얘기해주지 그랬느냐”며 서운함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은퇴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선 감독은 플레잉코치직을 제안했지만 이종범은 이날 김조호 KIA 타이거즈 단장을 만나 은퇴 의사를 전달했다. 미국이나 일본 등 해외연수도 제안받았지만 이종범은 “그냥 됐다”며 단장실을 나와버렸다. KIA 구단은 급하게 은퇴 보도자료를 발표했고 이종범은 1일 한화와의 시범경기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잠적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2군에서 시즌 개막을 맞이한 적이 없었던 이종범에게 “개막 엔트리에 포함되기 어려울 것 같다”는 통보는 받아들이기 힘든 충격이었다. 팬들도 KIA 홈페이지를 찾아 “타이거즈의 레전드를 이런 식으로 내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이종범은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최고의 타자였다. 해태에 입단한 1993년 이종범은 타율 0.280, 16홈런, 73도루로 단숨에 1번 타자 자리를 꿰찬 뒤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며 시리즈 MVP에 올라 진가를 과시했다. 이듬해엔 0.393의 타율로 196안타, 84도루를 기록하며 국내 최고 타자로 자리매김했다. 1996년과 1997년에는 각각 25홈런, 30홈런을 터뜨리며 장타력까지 폭발했다. 1997년에는 64도루를 기록하며 전무후무한 30-60클럽에 가입하기도 했다.

일본 무대에 진출했지만 부상을 입고 3년 반 동안 제대로 된 성적을 못 내고 한국으로 돌아와 내리막길을 걸었다. 통산성적은 타율 0.297, 1797안타, 194홈런, 730타점, 510도루.

서기열 기자 phil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