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정치 계절…테크노크라트가 중심잡아야
한국 사회에서 정치과잉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정치과잉, 이념과잉 현상은 점점 심해져왔고, 작년부터는 이미 선거 이야기가 온 나라를 뒤덮었다. 엎치락 뒤치락하는 정치 싸움을 지켜보는 국민 입장에서는 답답한 노릇이다.

세계 경제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이 판국에 단기적으로 우리경제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심각한 논의는 보이지 않는다. 나아가 우리 경제와 국가의 중장기 경쟁력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 역시 실종됐다. 더욱 큰 문제는 모든 분야에 걸쳐 정치가 중심 이슈가 되고 있다는 데 있다. 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과학기술도, 문화예술도, 심지어 기업 경영에서도 정치가 큰 변수로 등장하고 있다. 정치적 담론(談論)이 각 분야를 지배하게 되면, 전문가가 아니라 정치적 맥락을 잘 읽어내는 사람이 득세하게 된다. 그 결과 모든 분야의 깊이는 얕아지고, 정치적 판단과 의사결정에 따라 모든 일이 결정되는 사태가 생기게 된다. 소위 ‘당이 결정하면 따른다’는 식의 황당한 사고방식이 이미 우리 주변에서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지 않은가.

이럴 때일수록 필요한 것은 사실에 근거해 과학적 방법으로 문제를 진단하고, 합리적인 해법의 대안을 만들어내는 전문가의 능력이다. 국가 정책 의사결정이나 관리·운영에서 과학적이고 전문적인 지식이나 능력을 갖춘 사람을 테크노크라트(technocrat), 즉 기술관료라고 한다. 테크노크라트가 왜 중요한지는 요즘의 유럽 재정위기 전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남유럽 국가들의 경제위기는 그 원인이 여러 가지다. 중요한 것은 위기 상황에서 탈출하기 위해 그리스와 이탈리아가 선택한 것이 테크노크라트형 리더십이었다는 점이다. 이탈리아의 새로운 총리인 마리오 몬티를 중심으로 한 내각이나 그리스의 새 총리 루카스 파파데모스의 내각은 모두 테크노크라트들이 그 중심에 있다. 정치가 공리공론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때 이들은 사실에 근거한 분석으로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고, 거기에 합당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때로는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대안도 적극적으로 설득해 나가면서, 정치 과잉으로 위기에 빠진 국가를 그나마 아슬아슬하게 살려나가고 있다.

정치가 제 영역을 벗어나 테크노크라트가 마땅히 역할을 해야 하는 영역까지 침범하게 되면, 왜곡된 사실이 실증적인 분석 결과를 가리고, 합리적 대안이 아니라 ‘아니면 말고’식의 정책 한탕주의가 난무하게 된다.

국가정책에서 테크노크라트가 제 역할을 하려면 먼저 그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 무엇보다 테크노크라트들이 전문성을 배양할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과 직업적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또한 테크노크라트로서 제 목소리를 정당하게 낼 수 있도록 유·무형의 보호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각 분야에서 검증된 전문가들이 정책 의사결정 라인에 참여하고, 장기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유인제도도 가다듬어야 한다. 국회 역시 이념에 능한 사람만이 아니라 테크노크라트를 받아들여 사실과 합리로 국정을 바라보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

또 한 가지 기억할 점은 테크노크라트들은 장기적인 비전 아래 육성되는 국가적 자원이란 점이다. 2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프랑스의 에콜 폴리테크닉은 테크노크라트의 배양지 역할을 지금도 계속해 나가고 있다. 중국의 3세대 지도자들이 테크노크라트로 길러진 사람들이란 점 역시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정치가 그나마 할 일이 있다면, 국가의 백년대계를 생각하면서 테크노크라트가 육성되고 올바른 역할을 해 나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바로 그런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테크노크라트 역시 스스로 높은 전문성과 윤리의식으로 무장할 때 정당한 역할이 주어질 것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꿈과 비전을 제시해 주는 정치 역할은 꼭 필요하다. 그러나 테크노크라트의 냉철한 분석으로 균형이 잡히지 않으면, 현실은 모른 채 텅 빈 뒤주를 앞에 놓고 고매하게 정의를 이야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정동 < 서울대 교수·과기정책 객원논설위원 leejd@sn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