反성장주의자 김용? … 서방언론 괜한 딴죽
미국 뉴햄프셔주 하노버시에 있는 다트머스대. 세계은행 총재로 지명된 이 학교 김용 총장(53·사진)을 만나기 위해 26일(현지시간) 총장실로 들어섰다. 초봄 이상기후로 매서운 칼바람이 불었지만 뉴욕에서 다섯 시간 넘게 운전해 찾아간 길이었다.

20명 가까운 한국 특파원단의 거듭된 인터뷰 요청에도 한국계인 김 총장은 끝내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총장실 건물 정문 앞에 모인 기자들을 학교 홍보담당자인 저스틴 앤더슨이 상대하는 사이 김 총장은 뒷문으로 황급히 건물을 빠져나갔다. 앤더슨은 “CNN 로이터 등 미국 주요 언론들의 인터뷰 요청도 모두 거절했다”고 전했다.

김 총장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언론과의 접촉을 피하는 이유는 그만큼 세계은행 총재 선임이 국제적으로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중국, 브라질 등 신흥국들은 최근 들어 1946년부터 미국이 세계은행 총재직을 독점해온 데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왔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계인 김 총장을 지명한 것도 이를 의식해서다. 하지만 김 총장도 역시 국적이 미국인만큼 내달 21일 이사회에서 공식 선임되기 전까지는 ‘미국이 지명했으니 사실상 확정된 것’이라는 오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김 총장의 판단이라기보다는 워싱턴의 통제에 따른 것이다. 앤더슨은 “모든 미디어 관련 사안은 백악관과 재무부가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인터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 총장이 입을 다문 이유는 결국 워싱턴의 ‘입단속’ 때문이라는 얘기다.

게다가 그가 2000년 두 명의 학자와 공동 집필한 저서 ‘죽음을 무릅쓴 성장(dying for growth·사진 오른쪽)’이 문제가 됐다. 김 총장은 책에서 “신자유주의와 기업 주도의 경제성장이 개발도상국의 중산층과 빈곤층을 더욱 어렵게 한다”며 ‘반성장주의적’ 견해를 피력했다. 윌리엄 이스털리 뉴욕대 경제학과 교수는 “김 총장은 성장에 반대하는 첫 번째 세계은행 총재가 될 것”이라며 “세계은행에 가장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나조차도 경제성장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비판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와 관련, “김 총장이 만약 세계은행이 경제성장에 어떤 동력을 제공할지에 대한 강력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헤비급 라이벌인 응고지 오콘조 이웨알라 나이지리아 재무장관의 선거운동이 활기를 띠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6일자 사설에서 다른 이유로 “김 총장의 세계은행 총재 선임이 다트머스대나 세계은행 두 조직 모두를 위해 좋지 않다”고 썼다. 다트머스는 탁월한 리더를 잃게 될 것이며 (힘이 빠져야 할) 세계은행은 너무 과분한 리더를 맞이하게 될 것이란 주장이다.

신문은 이어 “경제와 금융, 정책결정에 대한 경험이 없는 김 총장이 외부인의 시각으로 세계은행의 무책임하고 관료적인 문화를 개혁하는 데는 가시적인 성과를 낼 것”이지만 “이는 빈곤을 퇴치하는 데 빈약한 성과를 보여온 세계은행이 사라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논평했다.

미 재무부는 김 총장이 27일부터 에티오피아를 시작으로 중국 일본 한국(4월1일) 인도 브라질 멕시코 등 7개국을 11일간 일정으로 방문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방문에서 각국 재무장관을 만나 세계은행의 정책방향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눌 것으로 알려졌다. 미 재무부는 이번 방문을 ‘경청투어(listening tour)’라고 설명했다.

뉴욕=유창재 특파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