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 칼럼] 어설픈 화해는 싫다던 철의 여인 대처
“어떻게 말하는가보다 무엇을 말하는지에 관심을 가져주면 좋을 텐데.” 지도자가 되기엔 목소리가 너무 날카롭다는 지적에 대한 반론이다. 대처는 그러나 대중의 마음과 신뢰를 얻기 위해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법을 배운다. 우아하되 특권층처럼 보이지 않기 위한 옷차림과 헤어스타일도 익힌다.

영화 ‘철의 여인’은 서구사회 최초의 선출직 여성 수반이자 영국병 치료자로 불리는 마거릿 대처(87)의 삶을 다룬다. 영화는 대처에게 그리 호의적인 것 같지 않다. 회상 형식이라지만 한창 시절 대처가 아닌 치매에 걸린 그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도 그렇고, 에피소드 중심의 구성으로 여성인 그가 어떻게 ‘기름 바른 장대’에 올라 총리 3연임이란 놀라운 기록을 세울 수 있었는지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주는 울림은 작지 않다. 귀족사회가 엄존하고 여성에 대한 편견 또한 극심하던 시절, 지방 소도시 식료품집 딸이 결혼해 쌍둥이를 낳은 뒤 법률 공부 끝에 변호사가 되고, 국회 입성 20년 만인 쉰네 살에 총리가 되는 사실을 보는 것만으로도 숙연해지는 까닭이다.

정치생활 내내 변치 않는 신념과 타협을 거부하는 태도 또한 인기를 위해 툭하면 말을 바꾸는 국내 정치인의 모습과 오버랩돼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대처의 삶은 영화 속 말마따나 매일매일이 전쟁이었다. 옥스퍼드대(화학)를 나온 변호사였는데도 정치 입문은 ‘집에서 애나 볼 것이지’란 말에 가로막혀 쉽지 않았고,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도 동료로 인정하지 않고 애써 무시하려는 남성들의 조소 속에 지냈다.

하지만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집권 내내 고수한 대처리즘은 1968년 10월 보수당 대회에서 연설한 ‘정치의 과오는 무엇인가’에 나타난 내용과 다르지 않았다. 연설의 골자는 정부의 지나친 개입과 그로 인한 국민의 정부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야말로 정치의 가장 큰 과오라는 것이었다. ‘지나친 복지정책은 국가와 국민 모두를 망가뜨린다, 누구나 자신의 능력과 노력에 의해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국민을 위해 필요한 건 공짜 우유보다 무료 도서관이라고 믿었던 그는 1979년 총리가 된 뒤 작은 정부에 기초한 국영기업 민영화, 기업가정신 고취, 세금 감면, 법과 질서 준수에 앞장섰다. 정부가 할 일은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 기반을 조성해주는 것이며, 높은 세율은 근로의욕을 빼앗는다며 79년과 88년 소득세와 법인세를 낮췄다.

집권 3기째인 1988년까지 자동차 가스 항공사 등 20개사를 민영화하고 고용법과 노동조합법 개정을 통해 클로즈드숍 제도를 완화, 동정 및 지원 파업 금지, 조합간부 선출 등 주요 안건의 비밀투표제를 도입했다. 노동조합이 노동자를 괴롭힌다는 이유에서였다. 1982년엔 포클랜드 전쟁에서 승리, 1976년 소련으로부터 얻은 ‘철의 여인’이란 별명을 대명사로 만들었다.

대처는 1979년 여왕에게 총리 임명장을 받은 뒤 이렇게 말한다. “책임감을 갖고 열심히 일하겠다. 불화를 화목으로, 오류를 진실로, 의심을 믿음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도록 힘쓰겠다.” 어설픈 화해자, 여론만 신경 쓰는 지도자가 되지 않겠다며 타협을 거부하던 그는 유럽 통합 반대와 인두세 도입 등으로 결국 낙마했다.

그의 연설 어디에도 우리 정치인들이 툭하면 내뱉는 ‘봉사’란 단어는 없다. 억대 연봉에 온갖 수당, 보좌관과 비서관 봉급까지 치면 1인당 연간 5억원 넘게 쓴다는 국회의원들이 봉사를 입에 달고 사는 건 어불성설이다. 대다수 다른 정치인과 공직자도 마찬가지다. 국민이 원하는 건 입에 발린 봉사도, 말뿐인 서번트 리더십도 아니다. 그저 88만원 아르바이트생에게도 강조되는 성실성과 책임, 정직함을 요구할 뿐이다.

대처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다. 깊을 대로 깊어진 영국병을 치료했다는 것과 친기업적 정책으로 빈부격차를 늘렸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그러나 영국인들에게 기업가 정신을 심고 흐트러졌던 법과 질서를 바로잡고 부당하게 운영되던 노동조합 문제를 해결한 것만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4·11총선을 앞둔 지금 ‘역사란 무엇이었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될 수 있느냐에 대한 것’이라고 외치던 대처의 또다른 한마디가 귓가에 아른거린다. “말을 조심해, 행동이 된다. 행동은 습관, 습관은 성격, 성격은 운명이 된다. 우리는 생각하는 대로 된다.”

박성희 논설위원 · 한경아카데미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