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초등생 꿈이 '공무원'인 나라
정준양 포스코 회장이 지난 16일 주주총회에서 이사의 ‘책임감경(減輕)’을 위한 정관변경안을 철회한 뒤 본지 기자에게 털어놓은 속내는 기업과 최고경영자(CEO)들의 고민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회적 여론과 분위기도 감안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포스코는 바뀐 상법에 따라 이사의 배상책임을 덜어주는 정관변경안을 올렸다가 주총 도중 일부 주주들의 반대 발언이 나오자 곧바로 접었다. 최대 주주인 국민연금과 일부 외국인 투자자들이 ‘주주가치 훼손’을 이유로 반대 의사를 밝힌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관측이 있다.

이사책임 면제에 대한 '오해'

1년간 총보수액의 6배(사외이사 3배)를 초과하는 금액에 대해 이사의 배상책임을 면제해줄 수 있다는 개정 상법 400조 2항이 올해 주총에서 엉뚱한 혼선을 불러왔다. 주총을 앞둔 기업들은 눈치 보기에 바쁘다. 사내외 등기이사의 잘못된 경영 의사결정으로 회사에 손해가 발생할 때를 대비한 것이 이사책임 조항이다. 무리한 투자나 신규 사업을 벌이다 회사에 중대한 손실을 끼쳤다면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경영의사 판단범위와 결과에 대한 책임을 어디까지, 어떻게 묻느냐가 문제다.

현행 상법 400조는 이사의 회사에 대한 책임을 모든 주주의 동의로 면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부분 상장사에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다음달 15일 시행되는 개정 상법이 이 조항에 더해 이사책임 감경을 위한 400조 2항을 추가한 이유다. 일본 회사법은 대표이사는 1년 연봉의 6배, 일반이사는 4배, 사외이사는 2배를 초과하는 돈에 대해 배상책임을 면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400조 2항을 근거로 정관을 바꿨거나 바꾸려는 기업들은 이사책임을 면제해야 할 치명적 경영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은 ‘제로(0)’에 가깝다고 장담한다. 작년 상법 개정 당시 기업들은 이사책임 감경 조항을 강하게 요구하지도 않았다. 많게는 1000억 원이 넘는 한도까지 임원배상책임보험을 가입해 안전장치를 마련해놓아서다.

기업인이 도전 정신 잃는다면

상법 개정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한 채 기업인을 부정적으로 보는 편견이 논란을 만들었다. 개정 상법은 400조 2항에서 이사의 고의·중과실로 인한 경우와 경업금지, 회사기회 유용금지, 자기거래 금지규정을 위반하는 경우에는 책임을 감면하지 못하도록 이미 그물을 촘촘히 쳐놨다. ‘국민정서법’과 ‘떼법’이 법 위에서 작동하는 게 ‘경제민주화’라고 할 수 없다.

이사책임 감경 조항은 상징성에 무게를 둔 것이라는 게 재계만 아니라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해석이다. 이사들이 보다 과감하게 경영적 판단을 내리고 사업적 리스크를 걸어 볼 수 있도록 ‘마음의 짐’을 덜어주자는 게 이 조항의 취지다. 기업인들이 모험을 두려워하고 눈치를 본다면 규정과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관료조직과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신뢰를 잃는 짓을 잊을 만하면 저지르긴 하지만, 기업가 정신은 우리 경제의 역동성을 이끌어 왔다.

얼마 전 만난 한 대기업 오너 경영인은 조직에서 ‘헝그리 정신’이 사라지고 있는 게 큰 고민이라고 했다. “간부들은 책임을 걸 만한 결정을 미루고 신입 사원들은 스펙만 화려하고….” 그렇지 않아도 우리 사회는 초등학생들이 꼽는 장래희망 1순위로 안정적인 공무원이라는 정답을 만들어 놓고야 말았다(9일 방송된 SBS ‘세대공감 1억 퀴즈쇼’에서 초등학생 1000명에게 장래 희망을 물어본 문제의 답).

유근석 산업부장 yg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