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지음(知音)
대표이사를 맡고 나서 달라진 것 중 하나가 내 이름으로 받는 우편물이 많아졌다는 거다. 나를 아는 많은 사람과 기관으로부터, 그리고 내가 알아야 할 많은 사람과 단체로부터 큰 봉투, 작은 봉투가 날아와 내 책상 위에 놓인다. 특히 명절이나 연말연초가 되면 수북이 쌓인 우편물이 마음의 짐으로 와 닿기도 한다. 슬쩍 훑어만 보는 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니, ‘개봉 개시’를 자꾸만 미루고 싶어진다. 그래도 혹시나 중요한 연락이나 서신이 있을 수도 있어 되도록이면 직접 챙겨 보려는 편이다.

지난달 내 생일 즈음이었다. 평범한 흰 봉투에 보낸 이가 ‘지음(知音)’이라 적힌 카드 하나가 눈에 들어 왔다. 지음이라면 ‘백아와 종자기’ 이야기에서 유래된 고사성어가 아니던가. 백아는 춘추전국시대 때의 거문고 명인이었다. 모든 이들의 칭송을 받던 백아였지만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제대로 이해해 주는 이는 종자기뿐이었다. 비가 내리는 소리를 곡으로 연주하면 그것을 알았고, 산이 무너지는 곡조를 켜면 그것을 알았다. 그러던 종자기가 병으로 죽자 백아는 자신의 소리를 알아주는 이 없는 세상에서 거문고를 켜 무엇 하겠느냐며 거문고 줄을 끊어 낸다. 이로부터 지음은 자신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해 주는 친구를 뜻하게 된다.

봉투를 열어 보니 오래 전 영업 현장에서 고객으로 만나 마음을 나눠 온 분으로부터 온 생일 축하카드였다. 생일을 기억해 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건만, 내 마음을 헤아리는 진심 어린 글에서 난 그날 큰 위로와 감동을 받았다.

누군가에 대해 아는 것이 참 쉬운 세상이다. 인터넷이며 페이스북이며 곳곳에 정보가 넘친다. 생판 몰랐던 사람이라도 어느 날 갑자기 관심권역에 들어오면 그 사람의 웬만한 정보는 쉽게 손에 들어온다. 그러나 그 사람의 정보를 많이 안다는 것(know)과 그 사람을 아는 것(understand)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내가 느끼는 걸 공감하고, 내가 생각하는 걸 이해해 주는 그런 친구는 정보의 양과는 거의 무관한 것이 아닌가 한다. 마음과 진심이 통하는 관계는 시간과 정보의 양으로 맺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내 삶과 상대방의 삶이 소통할 수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몇 번의 깊은 만남으로도 마음을 나누는 지음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필자는 직장 생활 대부분을 영업 현장에서 보냈다. 영업은 곧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일이다. 서로 간의 이익을 매개로 맺어지는 것이기에 처음부터 마냥 편안한 만남은 드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서로를 깊이 이해하는 지음의 관계가 될 수 있어야 오래가는 비즈니스 파트너가 될 수 있음을 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내가 당신에 대해 속속들이는 모르더라도 늘 당신을 염려하고, 당신을 지지하고 있다는 믿음을 주는 관계.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조웅기 < 미래에셋증권 대표이사 cho@miraeasset.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