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 역사의 지평을 넓혀주는 사실 너머의 질문, 1905년 한·중 연합군이 일본과 싸워 이겼다면…
지나간 미래처럼 흥미로운 것도 없다. 한 사람의 인생사는 끊임없이 삶의 갈림길에서 무언가를 선택해 온 이야기다. 그의 경험은 그가 선택한 것으로 짜여진 것이지만, 그의 기대는 그가 선택한 것과 선택하지 않은 것으로 가득 차있다. 한 사람을 제대로 알려면 경험만 알아서는 안 된다. 기대를 알아야 한다.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지나간 미래로 남아 있는, 사실(fact)이 아닌 반사실(counterfact)에까지 귀를 기울여야 한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만약 이성계의 고려군이 위화도를 넘어 요동에 들어갔다면, 만약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했다면, 이런 반사실적 질문이야말로 경험에 한정된 사안(史眼)을 고쳐 시대의 기대 지평을 통찰하게 인도하는 훌륭한 길잡이일지 모른다. 아래에 우리나라 역사의 어떤 지나간 미래 이야기를 한토막 적어 본다. 제목은 ‘1905년, 한·중 연합군이 일본과 싸워 승리하다’로 잡아봤다. 의암 유인석(柳麟錫·1842~1915)의 《의암집(毅菴集)》중 ‘중국에 가는 백경원을 보낸다(送白景源入中國)’이다.

‘우리나라는 나라가 작고 힘이 약해 오랫동안 제어를 받아 왔다. 비록 임금이 마음 속 깊이 원통해 하고 일국의 신민이 분해서 죽고자 하나 점점 수치가 깊어지고 화변이 커지는 것을 보기만 할 뿐 혼자서는 계책을 낼 수 없다. 중국 같은 나라는 수십 배나 되는 땅과 사백 조나 되는 인민으로 사람과 물자가 많고 무비가 튼튼한데 만고에 드문 치욕을 당하고도 아직껏 무엇을 해 보려고 하지 않으니 참으로 알지 못하겠다. 내가 근래 중국 소식을 들으니 원대인(袁大人)이 지금 북양대신이 되어 위망이 혁혁하고 백만 군대를 호령하며 마대인(馬大人)이 군사를 잘 거느려 명성이 화동(華東)에 진동하는데 지금 역시 대병을 옹위한다. (…)만약 중국이 수치를 씻는 일을 한다면 우리나라도 영향을 받아 다시 나라를 보존할 수 있지 않을까.’

의암은 중국을 끌어들이면 일본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무릇 전쟁은 때를 기다리고 형세를 타고 명분을 쥐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저들이 막강한 나라(러시아)와 상대해 서로 버틴 것이 해를 넘겼고 밖으로는 억지로 힘이 있음을 보이지만 안으로는 사실 병사와 돈이 바닥나 오직 우리나라를 빼앗아야만 계속 갈 수 있다. 만약 중국의 대군이 우리나라에 오면 저들은 병사도 늘릴 수 없고 재물을 장만하지 못해 스스로 무너질 것이니 이때야말로 정히 놓쳐서는 안 된다.’

그러면서 의암은 중국과 힘을 합하는 데 대한 ‘명분’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비록 때와 형세가 있어도 명분이 없으면 어렵다. 지금 중국이 씻어야 할 수치를 씻는 것인데 누가 안 된다고 하겠으며, 저들이 이미 조선을 중국과 둘로 나누어 자주독립이라 했다가 마침내 다시 저들의 속국으로 삼았고 단지 속국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아예 모두 빼앗으려 하니 이와 같은 것으로 명분을 삼을 만하다. 이것으로 전쟁을 일으킨다면 어찌 세상에 드문 큰 공을 이룰 만한 일이 아니겠으며 경사가 중국과 동국에 흘러 만세토록 죽백(竹帛)에 빛날 것이다. 만약 그 명분을 쥐지 않고 형세와 때를 버려 행하지 않는다면 이전의 수치를 무릅쓰고 영영 안고 가는 것이며 후일의 근심을 길러 스스로를 버리는 것이니 사태가 과연 어떠한가.’

의암은 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유교를 재건하기 위해, 처음 제천에서 복수보형(復保形)의 깃발을 올렸다. 때는 을미년, 명성왕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포고된 바로 그 때, 그는 화서학파의 중심 인물이 돼 14년 전 위정척사운동의 불꽃을 기억하며 다시 힘을 모아 거병했다. 일진일퇴 공방을 벌이며 세를 확장했으나 끝내 제천성을 잃은 그는 서북으로 달려 압록강을 건넜다.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자 다시 압록강을 건너 양서 지방을 순회하며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화서학파의 결집력을 다졌다. 1905년의 을사늑약과 1907년의 고종 퇴위는 그를 다시 해외로 내보냈다. 이번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그는 다시 항일의 깃발을 올렸다. 1896년의 제천과 1910년의 블라디보스토크, 그곳엔 다같이 의병이 있었고 의병의 최고 지도자는 의암이었다.

우리나라는 독립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의암의 기대는 그의 생전에 경험으로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는 그 기대를 평생 버린 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가 지향하는 미래였으며 그의 기대는 결코 그의 경험에 압도되지 않았다. 그럼, 언제 어떻게 할 것인가. 1905년 입동이 지난 어느 초겨울 한밤중에 일어난 을사늑약은 끊임없이 역사의 트라우마로 후인들을 괴롭히고 있지만 그는 독립을 잃은 이때가 도리어 독립을 회복할 적기라고 보고 있었다. 중국에 가자. 원세개를 설득하자. 일본은 러일전쟁으로 지쳐 있다. 한·중 연합군이 일본과 싸우면 된다. 청군이 들어오고 의병이 일어나면 된다. 물론 이 미래는 끝내 실현되지 않았지만 많은 유학자들이 의암의 기대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기대는 개인적인 기대를 넘어선 집단적인 기대였다.

하지만 원세개는 움직이지 않았다. 중국군은 오지 않았다. 이듬해 의병이 일어났고, 최익현은 태인에서, 민종식은 홍주에서 거병했지만 그것은 한국의 의병이었지 한·중 연합군은 아니었다. 한·중 연합군이 일본과 싸워 승리한다는 기대는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미래로 흘러가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 이상은 쉽사리 꺾이지 않았다. 20세기 전반 중국에서 활동한 한국 독립운동의 깊은 내면에는 한·중 연대가 숨쉬고 있었다. 1909년 하얼빈의 총소리와 1932년 상하이의 폭탄은 한·중 연대의식의 중요한 에너지가 되었다. ‘1905년, 한·중 연합군이 일본과 싸워 승리했다’는 진술은 반사실이지만, 그 역사적 반사실의 이면에는 20세기 전반 한국 독립운동의 어떤 정신적 원천의 하나를 읽어 내는 힌트가 담겨 있다.

노관범 < 한국고전번역원 전문위원 >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www.itkc.or.kr)의 ‘고전포럼-고전의 향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