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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팝 전성기 이끈 검은 '디바' vs 7옥타브 넘나드는 '신데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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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기의 라이벌 (27) 휘트니 휴스턴 - 머라이어 캐리

    세계 최다 수상 여가수 휴스턴
    음악에 둘러싸인 환경서 자라…발표한 앨범마다 흥행 대성공
    사고뭉치 남편 만나 몰락의 길로

    빌보드 차트 '1위 제조기' 캐리
    우연한 기회에 가수로 발탁…데뷔 앨범서 4곡 빌보드 정상
    소속사 사장과 결혼해 '전성기'
    팝 전성기 이끈 검은 '디바' vs  7옥타브 넘나드는 '신데렐라'
    ‘디바(diva)’는 실력 있는 여성 솔로 가수를 수식할 때 으레 쓰는 용어다. ‘재즈 디바’ ‘발라드 디바’ 등 대중음악계에서 익숙한 이 표현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클래식계에서만 쓰였다. 이탈리아어로 ‘여신’을 뜻하는 이 타이틀의 영예는 천부적인 실력으로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소프라노들에게만 돌아갔다.

    대중음악계에서 ‘디바’라는 찬사를 처음 받았던 인물은 지난달 갑작스런 죽음으로 전 세계 음악팬들을 비탄에 빠지게 했던 흑인 여가수 휘트니 휴스턴이다. 영화 보디가드의 주제곡 ‘I’ll always love you’로 잘 알려진 휴스턴은 타고난 감수성과 탁월한 가창력으로 그래미상 33회, 빌보드 어워드 16회, 아메리칸 뮤직어워드 22회 등 2010년까지 무려 415개의 상을 휩쓸며 세계에서 가장 많은 상을 탄 여가수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

    그런 휴스턴에게도 라이벌이 있었다. 1990년대 함께 활동하며 휴스턴보다 더 많은 빌보드 싱글차트 1위 곡을 탄생시켰던 혼혈 여가수 머라이어 캐리다.

    팝 전성기 이끈 검은 '디바' vs  7옥타브 넘나드는 '신데렐라'

    ◆타고난 재능 vs 신데렐라 스토리

    음악적 성공으로는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두 사람이지만 어린 시절만큼은 판이하게 달랐다. 1963년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난 휴스턴의 어머니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백업 보컬을 담당했던 유명 가스펠 가수 시시 휴스턴이고, 사촌 언니는 1960년대 대표적 리듬 앤드 블루스(R&B) 가수인 디온 워릭이다. 유복한 환경에서 당대 내로라하는 뮤지션들의 음악을 바로 옆에서 접하며 자란 휴스턴에게 가수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캐리는 휴스턴보다 7년 뒤인 1970년 오페라 가수인 어머니와 항공우주공학자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휴스턴과 마찬가지로 어머니로부터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았지만, 세살 때 부모의 이혼으로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게 됐다. 가수의 꿈보다는 눈앞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는 게 먼저였다. 미용학교 등에서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반면 선택받은 환경에서 자란 휴스턴은 어머니를 도와 클럽에서 가스펠 가수로 활동하던 1983년, 아리스타 레코드의 대표였던 유명 제작자 클라이브 데이비스에게 캐스팅되며 먼저 기회를 잡는다.

    1985년 자신의 이름을 딴 앨범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으로 데뷔한 그는 무대를 날려버릴 듯한 파워풀한 성량, 신인답지 않은 감정 처리, 호소력 짙은 흑인 특유의 음색을 선보이며 백인 음악 중심으로 짜여 있던 대중음악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Saving All My Love For You’ ‘How Will I Know’ ‘The Greatest Love Of All’ 등의 곡들은 예정된 순서를 밟듯 차례차례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올랐고, 데뷔 앨범은 14주간 빌보드 앨범차트 1위에 머물며 전 세계 솔로 가수의 데뷔 앨범 중 최고 기록을 세웠다.

    이때 캐리는 뉴욕 한 레스토랑의 평범한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캐리에게 ‘신데렐라 스토리’가 펼쳐지기 시작한 것은 휴스턴이 2집 앨범을 내던 1987년. 우연한 기회에 댄스 팝 가수인 브렌다 스타의 백업 보컬로 활동하게 된 것이 계기였다. 캐리의 재능을 알아본 스타는 당시 소니뮤직 사장인 토미 모톨라를 만나 캐리의 데모테이프를 건넸고, 그날 밤 모톨라는 곧바로 캐리에게 달려가 계약을 맺는다.

    ◆파워풀한 성량 vs 7옥타브의 기교

    1990년 캐리는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딴 1집 앨범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로 등장한다. 7옥타브를 넘나드는 고음과 간드러지는 기교가 돋보이는 캐리의 창법은 풍부하고 깊은 성량과 안정감 있는 보컬로 사랑받던 휴스턴과는 상반되는 색깔이었다. 이 앨범은 대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11주 연속 앨범차트 1위를 기록했고, 데뷔 싱글인 ‘Vision Of Love’를 비롯해 4개의 곡을 1위에 올려놓는 기염을 토한다.

    그해 그래미상의 최우수 신인상, 최우수 여성 팝 보컬 퍼포먼스상을 동시에 휩쓴 캐리는 단번에 휴스턴에 비견될 만한 여가수로 떠오른다. 캐리의 소속사는 대놓고 “휘트니 휴스턴의 경쟁자 등장!” 이라는 문구를 내걸며 둘의 경쟁구도에 불을 붙였고, 휴스턴의 독주를 못마땅해하던 일부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도 캐리를 지지하며 휴스턴의 가창력을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휴스턴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캐리가 데뷔한 1990년에 발매한 3집 앨범 ‘I’m Your Baby Tonight’은 전 세계적 으로 1200만장이 팔려나갔고, 캐리가 이듬해 낸 2집 앨범이 영미권 차트 4위에 머물며 주춤하는 동안 배우로 변신해 또 다른 성공을 거둔다. 1992년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보디가드’에서 부른 주제곡 ‘I will always love you’는 당시 최고 기록인 14주간 빌보드 정상을 기록하며 그의 변함없는 인기를 증명했다. 같은해 팝 스타 바비 브라운과 열애 끝에 결혼에 골인하면서 휴스턴은 행복의 최정점에 선다.

    ◆결혼이 바꿔놓은 운명

    두 디바의 삶을 크게 바꿔놓은 전환점은 ‘결혼’이었다. ‘사고뭉치’ 남편을 따라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한 휴스턴은 천상의 목소리와 매력적인 외모를 점점 잃어갔다. 하루 마약 구입 비용이 1300달러에 달하는 등 생활의 절제와 균형이 무너지면서 그 많던 재산도 사라져갔다. 이혼 직전에는 지인들에게 100달러를 꿔야 할 정도로 어려웠다고 한다. 2006년 이혼을 선언할 때까지 휴스턴에 대한 뉴스는 마약, 폭행 등 가십성 기사로만 채워져갔다.

    반면 캐리는 23세였던 1993년 자신을 발탁했던 소속사 사장 모톨라와 결혼하며 ‘신데렐라 스토리’의 절정을 보여준다. 그와의 결혼은 가수로서의 삶엔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유명 작곡가와 당대 최고의 프로듀서,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해 결혼 직후 발표한 3집 앨범 ‘music box’는 전 세계에 2800만장이 팔려나가며 휴스턴의 종전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다. 이듬해인 1994년 내놓은 캐럴앨범 ‘메리크리스마스’ 역시 ‘All I want for christmas’ 등 대형 히트곡을 탄생시켰고, 이어 1995년 발표한 앨범 ‘day dream’의 수록곡 중 보이즈투맨과 함께 한 싱글곡 ‘One sweet day’는 16주 연속 1위를 차지해 휴스턴이 ‘I will always love you’로 세웠던 기록을 경신해버렸다.

    하지만 멈추지 않을 것 같던 캐리도 1997년 모톨라와 이혼하면서 내리막길에 들어선다. 이혼 직후 발표한 앨범 ‘Heart breaker’는 음악적 완성도는 떨어진 반면 과도한 노출에만 치중한 탓에 ‘나이를 잊은 디바’라는 조롱을 안겨주었다. 게다가 셀린 디온이라는 슈퍼스타까지 출연하면서 두 디바의 시대는 막을 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를 악문 두 사람은 기어코 재기에 성공했다. 2005년 ‘The Emancipation Of Mimi’라는 앨범으로 컴백한 캐리는 싱글곡 ‘We Belong Together’를 14주 연속 정상에 올려놓았고, 15년간 들러리에만 머물렀던 그래미상에서도 3개 부문을 동시 수상하며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

    휴스턴도 제작자 클라이브 데이비스와 다시 손을 잡고 일어섰다. 2009년 내놓은 새 앨범 ‘I Look To You’는 첫주에만 30만장이 넘게 팔려나가며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라섰다. 마약의 후유증으로 과거와 같은 라이브 실력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암흑기를 극복하고 일어선 그녀의 모습은 박수를 받기에 충분했다.

    ◆영원한 라이벌이자 친구

    휴스턴과 캐리는 오랜 라이벌 구도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무조건 경원시하지는 않았다. 굴곡이 많은 개인사 탓인지 서로를 라이벌이면서도 평생의 친구로 생각했다. 지난달 12일 휴스턴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을 때 가장 먼저 애도를 표한 스타도 캐리였다. 그는 트위터를 통해 “비교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친구 휘트니 휴스턴의 충격적인 죽음에 가슴이 무너지고 눈물이 난다. 그녀는 세상을 은혜롭게 해준, 가장 훌륭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 중 하나로 우리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했다.

    둘 중 누가 더 훌륭한 가수였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두 여가수가 없었더라면 아직까지 대중음악사에 ‘여신’이라는 단어는 허락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정소람 기자 ra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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