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짱 토론] 경영권 감시 통해 기업가치 제고…국민재산 위탁자의 당연한 의무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문제가 사회적 관심을 끈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지만 학계와 금융계 등을 중심으로 한 논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계속돼 왔다. 주요 선진국들에서는 이미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가 관행으로 정착돼 있다. 투자기업에 대한 정보가 취약한 개인 투자자들이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는 주주권 행사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아직 형성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국민연금도 소극적인 주주권 행사로 일관해 왔다. 그 결과 주주인 국민의 의사가 기업 경영 전반에 제대로 반영되기 어려웠다. 서정욱 변호사 등 다수 법조인들은 지난 13일 낸 보도자료를 통해 투자 대상 기업에 주주권 훼손이 발생한 경우에도 국민연금이 주주 대표소송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회사 경영진의 임무 해태와 불법 등에 대해 제기된 다수의 주주 대표 소송에 국민연금은 원고로 참여하지 않고 있다. 주주들이 승소 판결을 받았는데도 원고로 참여하지 않아 무임승차한 사례도 다수 있다.

국민연금은 국내 최대의 기관투자가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591개 상장사에 투자했다. 이는 전체 상장사 1819개의 32%에 달하는 규모다. 특히 5% 이상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상장기업은 190여개, 9% 이상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은 50여개에 이른다.

우리 경제는 현재 재도약을 위한 새로운 촉매제가 필요한 상황이다. 그 방식 또한 자본주의 시장경제 논의에 적합한 방식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시장 원리에 따라 기업 경영의 혁신을 유도해 나갈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장기투자자이면서 동시에 주주로서 국민연금의 지위가 국민 전체 이익을 보호하기에 적합한 점 또한 주목해야 한다. 최고경영자(CEO) 등 기업 경영진은 짧은 재임기간 동안 눈에 띌 만한 업적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민간 투자자는 다수의 투자 기업과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 있다.

이에 반해 20년 내지 30년 이상 장기 투자하는 국민연금은 장기적 기업가치 제고에 역점을 둘 수 있다. 또한 민간투자자에 비해 개별기업과의 이해상충 여지도 적다. 경영 감시 등을 보다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적임자인 셈이다. 이를 통해 기업 가치가 향상되고 장기적 관점에서 주주이익 극대화가 이뤄지면 투자기업과 국민연금 모두 ‘윈-윈’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기업의 주요 주주인 국민연금이 주주가치를 훼손할 이유가 없다. 연기금들이 주주권을 적극 행사하는 경우 기업실적도 우수하다는 실증분석(캘퍼스 효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국민연금을 통한 적극적 주주권 행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공익가치 또한 무시돼서는 안 된다. 20~30년 이상 장기적으로 투자하는 국민연금은 미래성장동력 발굴 등 국가적인 중장기 프로젝트에 대한 전략적 투자가 가능하다.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동반성장,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협력 강화 등 한국 경제의 생태계를 보다 건강하게 만들어 가는 역할도 건실하게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국민연금의 주주권은 더 이상 행사할 것인가 말 것인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의결권, 주주제안권 등 주주권은 주주의 기본 권리에 속한다. 적법한 절차에 따르지 않고서는 이를 무작정 제한할 수 없다.

민법(제681조)은 타인재산의 수탁관리인에 대해 신의성실 및 선량한 관리자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국가재정법(제64조)도 국민연금 등 기금관리주체가 기금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의 의결권을 기금 이익을 위해 신의성실하게 행사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민의 재산을 위탁받아 관리하는 국민연금이 주주권 행사를 소홀히 할 경우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은 물론 형사상 업무상 배임죄 적용 등 법적 쟁송의 대상이 될 여지도 충분하다. 그런 점에서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현행 규정은 여러 가지 주주권 가운데 의결권에 관해서만 규정하고 있다. 가장 기본적인 주주권인 의결권을 효과적으로 행사하기 위해서는 주주총회 당일에 찬반투표를 하는 것만이 아니라 평소에 이사회를 통한 경영진에 대한 감시와 견제도 필요하다. 아울러 꼭 필요하고 중요한 안건의 주주총회 상정 등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도 있어야 한다.

사회 일각에서는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가 관치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는 여의도 정치인이나 과천의 관료를 개입시키겠다는 게 아니다. 주주권이 전 세계 투자자들에게 분산된 국내 기업의 경영에 정부가 부당하게 간섭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국민연금이 민간의 기업·금융·산업전문가들의 풀을 활용하여 투자대상 기업을 분석하고 시장원리에 따라 개입하자는 것이다.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는 경영권 간섭이 아니라 경영권에 대한 감시와 견제라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전문경영인의 역할은 존중돼야 하며, 주주는 이사회 등을 통해 경영진을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하면 된다.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외부의 지배구조펀드나 의결권행사전문기관 등에 아웃소싱을 하면 된다.

주주권행사를 정부로부터 독립된 민간전문가 중심의 위원회에서 행사한다면 기업경영에 대한 정부의 간섭이라는 해묵은 논쟁은 얼마든지 해소할 수 있다. 현행 법령을 고치지 않아도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국민연금의 내부 역량을 높이고 외부 전문가들을 많이 활용해야 한다.

이번 주주총회를 국민연금이 법률에 의해 부여받은 책임을 다하고 국민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 그동안 국민연금이 당연히 행사해야 할 주주로서의 권리를 재벌들이 무서워서 제대로 못했다면 우리 시장의 성숙도에 맞게, 또 시대 변화에 맞게 적극적으로 행사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최근 우리 경제에서 부각되고 있는 대기업·중소기업 간 불균형, 대기업의 무분별한 계열사 확장, 그리고 미래성장 동력원에 대한 투자 부족 등 문제들도 국민연금의 적극적 주주권 행사라는 시장의 힘에 의해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국민연금이 이러한 시대적 소명에 대한 의지를 갖고,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수준에서 성실한 주주권 행사라는 법률적 책임을 다해 나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