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d to Head] 책임감·빈곤 탈출의지 훼손…稅부담 늘고 재정건전성 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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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적 복지
자기가 쓸 돈, 세금으로 낸 후 복지서비스로 돌려 받는 꼴
보편적 복지 원조 스웨덴도 부유세 폐지 등 정책방향 바꿔
자기가 쓸 돈, 세금으로 낸 후 복지서비스로 돌려 받는 꼴
보편적 복지 원조 스웨덴도 부유세 폐지 등 정책방향 바꿔
복지 열풍이 우리 사회를 강타하고 있다. 정치권은 보육지원 무상급식 무상의료 기초노령연금 등 보육-의료-교육-노인과 관련된 복지를 중산층과 그 상위 계층에까지 확대하는 데 여념이 없다.
이 같은 ‘보편적 복지’는 한때 유럽 사회에서 유행하다가 오늘날에는 내쳐진 이념이다. 역사적 기원만을 본다고 해도 혼자 힘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가난한 사람을 가려내 이들을 돕자는 ‘선택적 복지’가 원칙이다. 그럼에도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보편적 복지를 살려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정치권이다. 그러나 살리려는 논리도 취약할 뿐더러 도덕적·재정적 관점에서도 옳지 않다. 보편적 복지는 과잉 복지요, ‘죽음의 구덩이’라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으로 중산층까지도 생활상의 위기로부터 예외일 수 없다는 이유에서 보편적 복지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위기를 자유자본주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정부의 무모한 경제개입과 방만한 통화관리 때문이라는 건전한 경제학의 확고한 인식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선택적 복지는 구호 대상자를 가려내는 과정에서 가난을 노출시켜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낙인효과 때문에 가난을 감춰주는 보편적 복지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한다. 그러나 가난을 은폐한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요, 자긍심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구호자라는 창피한 감정은 스스로 자립하겠다는 의욕을 북돋워주는 소중한 채찍이라 할 수 있다.
선택적 복지는 빈곤계층을 가려내고 추적하는 과정에서 비용이 생겨난다는 이유로 보편적 복지가 효율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보편적 복지는 자기가 직접 쓸 돈을 정부에 냈다가 복지서비스의 형태로 되돌려 받는 격인데, 주었다가 되돌려 받는 과정이 행정비용 낭비 등 비효율의 온상이라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자신이 쓸 돈을 정부에 내야 하기 때문에 소득 사용의 자유가 제한되는데, 이것도 간과할 수 없는 비물질적 비용이다.
보편적 복지는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자기 책임과 자립정신 대신 남의 돈에 의지해 살아가기를 원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정부의 복지에 의존하는 것을 선(善)으로 여기는 제도를 정의사회라고 말하는 것은 언어의 남용이다.
사회의책임 의존심 연대의식 등 보편적 복지의 기초가 되는 도덕적 가치는 진화심리학이 보여주듯이 ‘석기시대의 정신(stone-age mind)’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시사회와 같이 소규모 사회에나 적합한 본능적 가치를 오늘날과 같이 거대한 문명 사회에 적용하는 것은 도덕의 횡포다. 오늘날 인류에게 맬서스의 인구법칙을 극복해 자유와 번영의 열린사회를 가능하게 한 것은 사회의 책임을 자기 책임으로, 의존심을 자립심으로, 연대 의식을 재산권 도덕으로 교체한 결과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보편적 복지의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심각한 재정 조달 문제가 있다. 보육 의료 급식 등 정치권이 내놓은 복지 확대 공약을 보면 수십조원이 필요하다. 그래도 부자 증세를 하면 모두 해결될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지난해 말 통과된 ‘버핏세’의 예상 세수 규모가 보여주듯이 ‘부자 짜내기’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중산층에 대한 세금을 올리고 그 이하 소득 계층에 대해서도 면세를 없애거나 높은 세율을 부과하지 않을 수 없다.
천문학적 규모의 재정을 요하는 보편적 복지는 실패를 타고났다. 이는 북유럽의 역사가 또렷하게 보여준다. 1980년대 이후 20여년간 보편적 복지와 과도한 조세 부담으로 북유럽 국가들은 저성장과 고실업의 뼈아픈 고통을 겪어야 했다. 낮은 수준의 규제, 시장개방 등 세계에서 가장 친(親)시장적인 나라임에도 높은 조세 부담은 경제에 그토록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던 것이다.
이들 국가는 규제가 적은 자유경제임에도 조세 부담으로 참혹한 곤경에 빠졌었는데, 하물며 경제활동 전반에 걸쳐 규제가 첩첩이 쌓인 우리나라에서 보편적 복지를 위해 조세 부담을 늘려야 한다는 말은 참으로 두렵다. 규제가 심했음에도 우리 사회가 높은 성장률을 구가할 수 있었던 힘 가운데 하나가 낮은 조세였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우리 국민이 보편적 복지는 좋아할지 모르지만 조세 부담을 늘리는 것은 다른 나라 국민 못지않게 싫어한다. 그래서 중산층과 그 아래 소득 계층의 세금을 올리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복지를 확대해야 한다면, 돈을 찍어내거나 정부가 빚을 내서 나눠 먹는 것 이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파멸의 길이라는 것은 빚을 내 복지하다가 재정위기로 경제가 파탄난 이탈리아와 그리스가 또렷하게 입증한다.
따라서 우리가 갈 길은 가난한 사람의 생활 수준을 높이는 선택적 복지뿐이다. 독일의 건강보험이 보편적 복지의 영국보다 효율적인 이유는 그것이 선택적 복지이기 때문이다. 1인당 연간 누리는 의료서비스의 가치는 미국이 4800달러로, 스웨덴(2200달러)보다 배나 높은 것도 그런 복지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주는 수치다.
흥미로운 것은 스위스의 사례다. 비교적 조세 부담률이 낮으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 수준이 높은 나라다. 선택적 복지의 정신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까닭이다. 스웨덴의 생활 수준이 미국의 가장 가난한 6번째 주에 해당된다는, 그래서 선택적 복지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미국의 유명한 케이토연구소의 보고서도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오늘날 세계적 추세는 선택적 복지라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유럽의 어느 나라도 국정철학이 보편적 복지인 정부는 없다. 이런 복지의 원조인 스웨덴까지도 부유세 폐지, 개인연금 도입, 부채비율 40%대로 축소 등 피나는 개혁으로 보편적 복지에서 멀어지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 정치권은 이런 추세에 역행하면서까지 복지 확대는 물론이요 기업규제 청년고용의무제 가격규제 등 수많은 규제를 경쟁적으로 내놓고 있다.
정치권은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과잉 복지를 중단하고 경제활동의 발목을 잡는 규제를 완화하면서 ‘하위 20%’ 의 생활 수준을 개선하는 방향의 선택적 복지에 몰입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민경국 교수 (63)
△서울대 독문학과 졸업 △독일 프라이부르크대 경제학 박사 △강원대 경제학과 교수 △한국하이에크소사이어티 전 회장
이 같은 ‘보편적 복지’는 한때 유럽 사회에서 유행하다가 오늘날에는 내쳐진 이념이다. 역사적 기원만을 본다고 해도 혼자 힘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가난한 사람을 가려내 이들을 돕자는 ‘선택적 복지’가 원칙이다. 그럼에도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보편적 복지를 살려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정치권이다. 그러나 살리려는 논리도 취약할 뿐더러 도덕적·재정적 관점에서도 옳지 않다. 보편적 복지는 과잉 복지요, ‘죽음의 구덩이’라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으로 중산층까지도 생활상의 위기로부터 예외일 수 없다는 이유에서 보편적 복지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위기를 자유자본주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정부의 무모한 경제개입과 방만한 통화관리 때문이라는 건전한 경제학의 확고한 인식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선택적 복지는 구호 대상자를 가려내는 과정에서 가난을 노출시켜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낙인효과 때문에 가난을 감춰주는 보편적 복지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한다. 그러나 가난을 은폐한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요, 자긍심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구호자라는 창피한 감정은 스스로 자립하겠다는 의욕을 북돋워주는 소중한 채찍이라 할 수 있다.
선택적 복지는 빈곤계층을 가려내고 추적하는 과정에서 비용이 생겨난다는 이유로 보편적 복지가 효율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보편적 복지는 자기가 직접 쓸 돈을 정부에 냈다가 복지서비스의 형태로 되돌려 받는 격인데, 주었다가 되돌려 받는 과정이 행정비용 낭비 등 비효율의 온상이라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자신이 쓸 돈을 정부에 내야 하기 때문에 소득 사용의 자유가 제한되는데, 이것도 간과할 수 없는 비물질적 비용이다.
보편적 복지는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자기 책임과 자립정신 대신 남의 돈에 의지해 살아가기를 원하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정부의 복지에 의존하는 것을 선(善)으로 여기는 제도를 정의사회라고 말하는 것은 언어의 남용이다.
사회의책임 의존심 연대의식 등 보편적 복지의 기초가 되는 도덕적 가치는 진화심리학이 보여주듯이 ‘석기시대의 정신(stone-age mind)’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시사회와 같이 소규모 사회에나 적합한 본능적 가치를 오늘날과 같이 거대한 문명 사회에 적용하는 것은 도덕의 횡포다. 오늘날 인류에게 맬서스의 인구법칙을 극복해 자유와 번영의 열린사회를 가능하게 한 것은 사회의 책임을 자기 책임으로, 의존심을 자립심으로, 연대 의식을 재산권 도덕으로 교체한 결과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보편적 복지의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심각한 재정 조달 문제가 있다. 보육 의료 급식 등 정치권이 내놓은 복지 확대 공약을 보면 수십조원이 필요하다. 그래도 부자 증세를 하면 모두 해결될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지난해 말 통과된 ‘버핏세’의 예상 세수 규모가 보여주듯이 ‘부자 짜내기’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중산층에 대한 세금을 올리고 그 이하 소득 계층에 대해서도 면세를 없애거나 높은 세율을 부과하지 않을 수 없다.
천문학적 규모의 재정을 요하는 보편적 복지는 실패를 타고났다. 이는 북유럽의 역사가 또렷하게 보여준다. 1980년대 이후 20여년간 보편적 복지와 과도한 조세 부담으로 북유럽 국가들은 저성장과 고실업의 뼈아픈 고통을 겪어야 했다. 낮은 수준의 규제, 시장개방 등 세계에서 가장 친(親)시장적인 나라임에도 높은 조세 부담은 경제에 그토록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던 것이다.
이들 국가는 규제가 적은 자유경제임에도 조세 부담으로 참혹한 곤경에 빠졌었는데, 하물며 경제활동 전반에 걸쳐 규제가 첩첩이 쌓인 우리나라에서 보편적 복지를 위해 조세 부담을 늘려야 한다는 말은 참으로 두렵다. 규제가 심했음에도 우리 사회가 높은 성장률을 구가할 수 있었던 힘 가운데 하나가 낮은 조세였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우리 국민이 보편적 복지는 좋아할지 모르지만 조세 부담을 늘리는 것은 다른 나라 국민 못지않게 싫어한다. 그래서 중산층과 그 아래 소득 계층의 세금을 올리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복지를 확대해야 한다면, 돈을 찍어내거나 정부가 빚을 내서 나눠 먹는 것 이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파멸의 길이라는 것은 빚을 내 복지하다가 재정위기로 경제가 파탄난 이탈리아와 그리스가 또렷하게 입증한다.
따라서 우리가 갈 길은 가난한 사람의 생활 수준을 높이는 선택적 복지뿐이다. 독일의 건강보험이 보편적 복지의 영국보다 효율적인 이유는 그것이 선택적 복지이기 때문이다. 1인당 연간 누리는 의료서비스의 가치는 미국이 4800달러로, 스웨덴(2200달러)보다 배나 높은 것도 그런 복지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주는 수치다.
흥미로운 것은 스위스의 사례다. 비교적 조세 부담률이 낮으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 수준이 높은 나라다. 선택적 복지의 정신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까닭이다. 스웨덴의 생활 수준이 미국의 가장 가난한 6번째 주에 해당된다는, 그래서 선택적 복지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미국의 유명한 케이토연구소의 보고서도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오늘날 세계적 추세는 선택적 복지라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유럽의 어느 나라도 국정철학이 보편적 복지인 정부는 없다. 이런 복지의 원조인 스웨덴까지도 부유세 폐지, 개인연금 도입, 부채비율 40%대로 축소 등 피나는 개혁으로 보편적 복지에서 멀어지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 정치권은 이런 추세에 역행하면서까지 복지 확대는 물론이요 기업규제 청년고용의무제 가격규제 등 수많은 규제를 경쟁적으로 내놓고 있다.
정치권은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과잉 복지를 중단하고 경제활동의 발목을 잡는 규제를 완화하면서 ‘하위 20%’ 의 생활 수준을 개선하는 방향의 선택적 복지에 몰입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민경국 교수 (63)
△서울대 독문학과 졸업 △독일 프라이부르크대 경제학 박사 △강원대 경제학과 교수 △한국하이에크소사이어티 전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