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의 선율] 구세주를 잉태한 '비너스'…정통 기독교에 그리스신화 옷을 입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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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
마리아와 비너스가 한 몸
'정신과 육체의 균형' 추구…메디치家의 진보사상 담아
화폭 가득한 사랑의 전령
새 출발 앞둔 신혼부부…'인생의 봄'을 찬미
▶QR코드를 찍으면 명화와 명곡을 함께 감상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와 비너스가 한 몸
'정신과 육체의 균형' 추구…메디치家의 진보사상 담아
화폭 가득한 사랑의 전령
새 출발 앞둔 신혼부부…'인생의 봄'을 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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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백년가약을 맺는 커플에게 그림을 선물한다면 무엇이 좋을까. 우리네 조상들은 자식 많이 낳고 부귀영화를 누리라는 기원을 담아 모란 병풍이나 원앙 한 쌍을 그린 병풍을 선물했다. 우리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서양에서도 귀족들 사이에서는 신혼부부가 금실 좋게 살면서 자손 많이 낳으라는 기원을 담은 그림을 선물하곤 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산드로 보티첼리(1445~1510)의 ‘프리마베라(봄)’도 그런 그림 중의 하나다.
이 그림은 원래 피렌체공화국의 실질적 지배자였던 메디치가의 수장 로렌초 일 마니피코(1449~1492)가 조카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1463~1503)에게 줄 결혼 선물로 주문한 것이다. 르네상스 초기 시인 폴리치아노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이 그림은 기독교를 그리스사상과 결합시키려 했던 메디치가의 진보적 관념이 반영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화가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림을 읽어나가게끔 인물들을 배치했다. 먼저 오렌지 정원을 배경으로 맨 오른쪽에는 봄소식을 전하는 서풍(西風)의 신 제피로스가 배치돼 있고 그 옆에는 부인인 클로리스가 자리하고 있다. 제피로스는 이제 막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힘차게 내뱉기 위해 양 볼을 잔뜩 부풀렸다. 얼어붙은 대지에 봄바람을 쏟아내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기 위해서다.
그렇지만 봄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바람 좀 불게 한다고 헤프게 미소를 짓고 다가오지는 않기 때문이다. 제피로스가 봄의 전령이랍시고 생색을 내려면 아무래도 어여쁜 파트너가 필요했다. 결국 제피로스는 숲의 정령인 클로리스를 납치, 아내로 삼아 사랑을 나눈다.
둘이 뿜어내는 열기에 자극을 받아 얼어붙은 땅 밑의 씨앗들이 꿈틀댔다. 바람의 신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클로리스를 꽃의 여신 ‘플로라’로 만들어 대지의 씨앗들이 꽃을 피우게 했다. 클로리스 옆에서 꽃무늬로 장식된 드레스를 걸친 채 꽃을 뿌리는 여인이 바로 플로라다.
플로라 옆에 약간 뒤로 물러서 있는 여인은 봄의 대지를 온통 사랑으로 물들이는 사랑의 여신 비너스다. 그 옆에 서 있는 세 여인은 순결, 사랑,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삼미신(三美神)으로 그들은 비너스의 지시에 따라 처녀가 사랑을 하게 되면 자신들처럼 아름다워진다는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고 있다.
비너스의 머리 위에는 큐티드가 안대를 두른 채 불특정 다수를 향해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 그는 그렇게 세상을 사랑의 열기로 몰아가려는 비너스의 의지에 충실히 따르고 있다.
이 모든 이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듯 대지는 꽃과 열매로 충만하다. 이들이 발을 딛고 서 있는 땅 위에는 수많은 꽃으로 가득하다. 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이 그림 속에는 놀랍게도 500여가지의 식물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모든 이들이 이렇게 봄을 찬미할 때 맨 왼쪽의 한 인물만이 이런 현실을 외면한 채 화면 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새의 날개와 뱀이 조각된 ‘전령의 지팡이’를 들고 짧은 옷을 걸친 것으로 보아 그는 신들의 의사를 전달해주는 헤르메스신이 분명하다.
탁월한 지혜를 지닌 이 청년 신은 비너스와 사랑을 나눠 헤르마프로디토스를 낳았다고도 한다. 여기서 헤르메스와 비너스의 결합은 플라토닉한 정신적 사랑과 에로틱한 세속적 사랑의 합일을 의미하는 동시에 새출발을 앞둔 신랑과 신부를 의미한다. 헤르메스는 길목을 지키는 수호자의 역할도 맡고 있는데 이 그림에서는 지팡이를 들어 봄 동산의 훼방꾼인 먹구름을 정원 밖으로 몰아내고 있다.
이런 겉모습 외에 그림 속에는 메디치가가 강력하게 지지했던 신플라톤주의적 관념이 반영돼 있다. 그리스 철학을 기독교 교리와 결합시키려 한 이 새로운 관념은 아름다움이야말로 본질을 넘어선 최고의 가치며 그 속에는 신의 의지가 구현돼 있다고 봤다.
이 점은 비너스의 이중성에서 잘 드러난다. 그림에서 비너스는 미의 여신이자 성모 마리아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비너스의 뒤에 아치형으로 표현된 후광은 이 인물이 기독교 성자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를 마리아로 볼 경우 그녀의 살짝 부른 배는 구세주를 잉태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마리아는 온 세상을 새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는 만인의 어머니인 것이다. 인물들의 신체도 중세의 비현실적이고 딱딱한 묘사에서 벗어나 따끈따끈한 피가 흐르는 생기발랄한 인간적인 모습으로 표현됐다.
신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옷을 갈아입은 새로운 시대, 르네상스는 이렇게 그림을 통해 인간 중심적 문명의 봄이 도래했음을 축복하고 있는 것이다.
명화와 함께 듣는 명곡 비발디의 '사계' 중 '봄'
명화와 함께 듣는 명곡...비발디의 '사계' 중 '봄'
서둘러 봄기운을 느끼고 싶다면 안토니오 비발디(1678~1741)의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 중 ‘봄’을 들어보라.
바로크 음악 중 가장 잘 알려진 ‘사계’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네 계절을 그린 소네트(14행으로 이뤄진 짧은 서정시)에 곡을 붙인 것으로 네 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이뤄진 한 세트의 작품이다. 이 소네트에는 군데군데 베니스 방언이 섞여 있어 비발디의 작품일 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래서일까. 음악에 묘사된 네 계절은 소네트의 내용과 절묘하게 일치한다.
‘사계’ 중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의 여왕’의 경쾌한 분위기를 화려한 현악기 선율에 실었다. 그 뒤로 잔잔히 깔리는 쳄발로의 가녀린 선율도 부드러운 봄의 느낌을 전하는 데 그만이다.
꽃으로 가득한 보티첼리의 그림속 오렌지 정원 음악으로 표현한다면 아마도 이런 느낌이 아닐까. ‘봄’의 악보에 붙인 소네트를 감상하며 비발디의 선율을 따라가 보자.
“봄이 왔네. 새들은 지지배배 봄의 귀환을 축복하고 미풍은 졸졸졸졸 속삭이는 시냇물을 부드럽게 애무하네. 그러다 갑자기 봄의 전령인 우레를 동반한 폭우가 몰려와 하늘에 짙은 먹구름을 드리우네. 잠시 후 폭풍우는 잦아들고 새들은 다시금 지지배배 봄을 찬미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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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범 문화전문기자 · 미술사학박사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