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전두환 키즈들의 헌법 제119조2항
한나라당도 헌법 제119조2항의 경제민주화를 정강으로 삼겠다고 한다. 균형성장과 소득분배, 경제력 남용방지를 위해 국가가 경제를 규제하거나 조정할 수 있다고 규정한 조항이다. 6월 항쟁 뒤끝인 1987년 헌법 개정 당시 신중한 검토 없이 삽입됐다. 폐기돼야 한다는 주장도 많았지만 한번 만들어진 것은 좀체 없어지지 않는 법이다. 1항의 경제자유는 이렇게 2항의 개입 조항에 밀려나고 있다.

참혹한 유혈 사태를 거쳐 정권을 잡았던 전두환 정권이 민주주의의 싸구려 가면이라도 써 보자고 사회주의 이념을 빌려와 장식품으로 내세웠던 것이 문제의 발단이다. 혹시 모르겠다. 지금 전두환 옹이 “그것 봐라. 본인이 경제민주화의 씨앗을 뿌렸다”고 넋두리를 할지…. 그 독재정권의 참모였던 자가 지금 한나라당 비대위원인 김종인 씨다. 김종인 씨라면 ‘이렇게 빛 볼 날이 있구나’라며 늙은 사회주의자의 노래를 부를지 모르겠다. 전두환 시대에 청춘을 보낸 386들은 엄혹한 전두환 정권 하에서 뇌 속에 좌경화의 각인을 찍었다. 이제 그 486이 주류가 되면서 경제민주화 조항이 전면에 부상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경제민주화라는 이 단어는 그럴싸한 레토릭과는 달리 역사상 실패로 돌아간 허다한 사회주의적 향수에 불과하다. 선량한 정부가 공정하게 시장을 관리하면 국민 전체의 복지가 개선될 것이라는 발상은 국민 모두의 급여통장에 0자를 하나씩 더 새겨주면 모두가 10배씩 부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만큼이나 순진하다. 경제와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서도 그렇다. 경제 성장은 필연적으로 민주주의를 만들어내지만 그 반대 방향은 있어본 적이 없다. 성장 없는 평등은 가난의 평등을 말하지만 가난한 나라 중에 평등한 나라는 없다. 아니 그건 불가능하다.

경제민주화는 공짜복지를 늘리고 국고를 탕진하며, 집단이익의 발호와, 특권의 창설과, 관료들의 완장과, 완장들의 부패와, 이권을 물고뜯는 정치의 타락과, 실업자의 급증과, 빈털터리 경제와, 세금의 인상과, 빈부 격차 확대와, 가난의 양산을 필연적으로 불러오게 된다. 바로 20세기 좌경 사회주의가 걸어갔던 길이다. 벌써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우리사회다. 약사회와 의사회, 각종 단체와 조합들, 변호사들의 동업자 의식과 농민단체의 소고기 시위며 강성노조들이며 사이비 정치인들이며 관료들의 전관예우며 향우회며 동창회며 정치단체들이 지금 경제민주화를 부르짖고 있다.

나와 내가 속한 집단에 복지 특권을 보장하라는 이런 비열한 경쟁에서 서민과 약자들이 이길 방법은 거의 없다. 경제민주화는 그런 막힌 길로 눈먼 자들을 안내해 간다. 바보들은 정치의 실패를 언제나 시장의 실패라고 우기고 있다. 학자 관료 정치가 등 땀흘리지 않는 자들이 그것에 앞장선다. 상인 계급의 작은 비리들을 들추어 내는 것이 이들의 주특기다. 지식 계급의 진화적 본능이기도 할 것이다. 미국발 금융위기는 미 중앙은행(Fed)의 무분별한 통화공급이 원인이었지만 소위 ‘배운 바보’들은 드러난 결과와 숨겨진 원인을 혼동한다. 국가가 거품을 만들어 낸 다음에야 구더기처럼 투기꾼이 들끓게 되지만 이들은 거꾸로 말한다.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돌고 있다는 것을 설명해줄수록 바보들은 짜증을 낸다. 시장경제에 대한 반감도 이와 유사하다. 부패는 시장의 부족에서 생기지만 이들은 시장의 과잉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경제민주화는 필시 간섭의 증폭현상(intervention spiral)을 초래한다. 하나의 개입이 실패하면 더 근본적이고 더 강력한 개입이 요구된다. 그럴수록 더욱 발본색원적 대책이 필요해진다. 바로 그런 시도의 결과로 나치즘이나 문화혁명이나 킬링필드가 태어나는 것이다. 지구 아닌 태양을 돌리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한다. 굳이 표현하자면 ‘갈등을 계획으로, 혼란을 목적으로’ 대체하려는 것이 사회주의다. 이 부드러운 말에 속은 자가 한둘이 아니다. 후회는 언제나 뒤늦게 찾아온다. 부디 조심하시라.

정규재 논설실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