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멋진 스승
1981년 대학원에서 송상현 교수님을 처음 만났다. 10명이 오붓하게 수강하는 해상법은 신기하고 매력적이었다. 교수님의 참신하고 자신감에 넘치는 강의는 정말 좋았고 뉴욕 로펌에서 일하신 이야기를 듣고 큰 세상에서 마음껏 활동하고픈 마음이 생겼다. 교수님은 2003년 설립된 인류 최초의 항구적 형사재판소인 국제형사재판소 초대 재판관에 당선됐고 2009년 재판소장으로 선출돼 우리나라 최초 국제사법기구 수장이 되셨다.

30년간 가까이에서 지켜본 교수님은 장점이 참 많은 분이다. 열정 그 자체, 끊임없는 노력가이시다. 국제형사재판소의 피고인이 주로 프랑스어를 쓰는 아프리카 독재자들이므로 프랑스어를 더 잘 이해해야 한다며 지금도 헤이그에서 프랑스어를 혼자 공부하신다. 국제형사재판소의 활동을 설명하고 참혹하게 손발이나 귀, 코 또는 입술이 잘린 전쟁피해자를 만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우간다 탄자니아 콩고 등지를 여러 차례 방문하셨다. 덕분에 출범 당시 80개국이었던 회원국이 지금은 119개국이 되었다고 흐뭇해 하신다.

교수님은 제자 사랑이 각별하다. 필자는 20년째 교수님 댁을 새해에 방문하는데 300여 제자들이 북새통을 이룬다. 필자의 유학 시절에도 교수님은 매년 들러 따뜻하게 격려해주셨고 서신을 드리면 바쁜 중에도 꼭 자세히 답장을 해주셨다. 외국 대학 입학시즌이면 추천서 수백 장을 몸소 쓰느라 바쁘시다. 후학이 잘되는 것이야말로 스승의 가장 큰 기쁨이 아니겠는가. 필자가 시위에 연루돼 사법시험 면접에서 낙방하고 고뇌할 때 선생님이 서슬 퍼런 군부정권 실세들을 직접 만나 끈질기게 담판한 덕분에 다음해 면접을 통과할 수 있었다. 교수님의 용기와 사랑에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선생님은 담백한 분이어서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 한국지적재산권법학회를 창설해 키운 다음 아낌없이 후진에게 양보하셨다. 또 국제거래법학회를 창설해 최고의 학회로 성장시켜 홀홀히 후배에게 넘겨주셨다. 필자가 귀국했을 때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앞으로 여러 자리를 맡으라는 요청이 많을 걸세. 그때 신중하게 맡을 자리인지 판단하게.” 필자가 가르침을 제대로 따랐는지 생각하면 등에 땀이 난다. 선생님은 반듯한 분이다. 홀로 되신 모친을 수십 년 한집에서 모신 효자이며 스캔들이 일절 없다. 할 일과 하지 않을 일을 명확히 구별하신다. 아마도 독립운동가이신 조부 송진우 선생의 가르침을 체득하신 모양이다.

법조계에 인재들이 많지만, 국제적 식견이 뛰어나고 세계 최고의 인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해 우리나라를 빛낸 글로벌 법조인은 선생님이 최초가 아닌가 한다. 자랑스런 제자를 양성하고 그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애정어린 조언과 협조를 아끼지 않은 선생님이야말로 스승의 진정한 표상이다.

김현 < 법무법인 세창 대표변호사 hyunkim@sechanglaw.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