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장 규모 맞춰 볼륨 업
현 진동 증폭해 새 기타 창조… 에릭 클랩튼·지미 헨드릭스 등
'전설'들 애용하며 인기 한몸에…신중현에게도 기타 헌정 화제
라인 이원화로 수익 다변화
아마추어·전문가용 따로 생산…기타 매출만 연 6억달러 넘어
펜더의 제품은 수십년간 전 세계 유명 연주자 및 팝스타의 손에서 연주되며 록 뮤지션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줬다. 수많은 후발주자들이 펜더 기타의 디자인과 품질을 모방했지만 품질, 지명도, 회사 규모에서 지금까지도 펜더를 넘어선 업체는 없다.
펜더의 매출은 2010년 6억2500만달러 정도로 전 세계 악기업계에서 야마하 하먼에 이어 세계 3위다. 기타업계에서는 세계 1위다. 야마하와 하먼은 피아노, 관악기, 현악기, 스피커 등을 취급하는 종합악기업체인 반면 펜더는 전기기타, 전기베이스기타(일렉트릭 베이스), 앰프 및 주변기기 등 록음악 관련 기기만 생산한다. 펜더기타의 연간 판매량은 약 70만대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혁신으로 악기업계 변혁
어릴적부터 기계를 분해하고 연구하는 것을 좋아하던 창업자 레오 펜더는 대학 졸업 후 회계사로 일했다. 그러나 곧 싫증을 느끼고 25살이던 1934년 캘리포니아에 라디오 수리점인 펜더 라디오 서비스를 열었다. 그는 어린시절부터의 기계를 만진 경험을 바탕으로 실력 좋은 수리점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1940년 레오 펜더는 자신의 기타를 개조해 달라는 한 기타리스트의 요청을 받고 사업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당시 점차 커지는 공연장 규모에 비해 기존 악기는 소리가 너무 작았던 것. 마이크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그는 자석을 이용해 기타의 현 진동을 증폭하는 장치를 만들었다. 이를 이용해 기존 통기타(어쿠스틱기타)와는 다른 형태의 기타를 만들어 낸 것. 기타 현의 진동을 울림통을 통해 증폭시키는 통기타와는 달리 현 진동 증폭장치(픽업)를 통해 소리를 키우는 것이 핵심이었다. 울림통 없이 나무판에 줄을 맬 수 있어 부피가 줄고, 마이크 대신 스피커에 직접 기타를 연결할 수 있어 악기 소리를 키울 수 있다는 점을 노린 것이었다.
레오 펜더는 라디오 수리점을 기타공방으로 바꿔 1943년 최초의 주문제작형 일렉기타를 만들어 팔았다. 1945년에는 동업자인 독 카우프만과 기타 제조사를 설립한다. 1949년 레오 펜더는 시장 선점을 위해 1950년 악기전시회에 출품했지만 혹평을 받았다. 일렉기타의 낯선 모습을 두고 ‘눈 치우는 삽’처럼 생겼다는 악담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큰 출력을 원하던 연주자들이 전기기타를 구매하기 시작했다. 레오 펜더는 1960년대 들어 업계 최초로 개인 공방이 아닌 여러명이 분업을 통해 제품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기타를 만들고 일렉트릭 베이스를 개발하는 등 전기기타 대중화를 추진했다. 이때 나온 제품이 ‘일렉 기타의 표본’이라 불리는 ‘스트라토캐스터’다. 이후 에릭 클랩튼, 제프 벡, 리치 블랙모어, 지미 헨드릭스 등 전설적인 기타리스트들이 펜더의 제품을 쓰면서 펜더기타는 ‘명기’로 자리잡게 됐다.
○대량 생산 탓 위기…원칙 회귀
레오 펜더는 1965년에 미디어 기업 CBS에 회사를 1300만달러에 매각했다. 당시 뉴욕양키스 야구팀이 1100만달러에 거래된 것을 보면 이 회사가 가치가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다. 레오펜더가 시장성 높은 회사를 판 이유는 기존의 수작업 위주의 생산으로는 급증하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퇴사 후 다시 G&L이라는 기타회사를 설립한다.
CBS는 인수 이후 수익을 높이기 위해 대량생산체제를 도입했다. 가격도 이전 제품에 비해 30% 이상 낮췄다. 하지만 제품의 품질이 나빠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음악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는 악기사업에서 수익성만을 중시한 탓이었다. 대량생산체제로 1980년대 초까지 펜더의 외형은 커졌다. 하지만 내구성과 기타의 가장 중요한 소재인 목재의 질이 떨어지자 연주자들은 점차 펜더를 외면했다. 학생들이나 취미로 연주하는 사람들이 주요 구매자가 되자 사세도 기울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 매출이 절반 가까이 급감하자 CBS는 창업 초기부터 펜더에서 일했던 당시 최고경영자(CEO)인 윌리엄 슐츠 및 주요 주주들에게 회사를 넘겼다.
슐츠는 취임 후 창업주의 경영철학으로 복귀하겠다고 선언했다. 생산량을 대폭 줄이는 대신 제품의 품질을 높여 수익을 높이겠다는 복안이었다. 펜더는 디자인을 변경하고 모델 일부를 단종시키는 등 군살 빼기에 나섰다. 펜더는 1987년부터 다시 인기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1990년 매출은 사상 최초로 1억달러를 넘어섰다.
○라인 다양화로 수익 다변화
펜더는 1987년 이후 저가라인과 고급라인으로 제품군을 다양화했다. 일반 소비자와 고급 제품을 원하는 전문 연주자들의 입맛을 다 만족시키기 위해서다. 일반 소비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제품이자, 이 회사의 최고 히트상품 ‘아메리칸 스탠더드 스트라토캐스터’도 이때 개발됐다.
펜더는 멕시코 일본 한국에 생산기지를 세워 1대당 500~1000달러 수준의 저가품을 대량으로 만드는 한편 캘리포니아 코로나에 고급 기타 수제생산라인인 커스텀숍을 업계 최초로 설립해 프리미엄 기타시대를 열었다.
커스텀숍에서는 10년 이상의 제조경력을 지닌 전문가 ‘마스터 빌더’ 300여명이 상주하면서 100% 수작업으로 기타를 만든다. 대당 3000달러 정도의 제품을 주로 생산한다. 기타에 빌더의 이름을 서명할 정도로 품질에 대한 자부심도 높다. 커스텀숍에서는 3년 이상 건조시킨 최상급 목재와 최고급 부품만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커스텀숍 제품은 언제든 무상수리를 받을 수 있고 구매자를 평생 고객으로 등록해 관리한다.
임기훈 기자 shagg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