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 세계 1위 PC업체 휴렛팩커드(HP)는 스마트폰 사업을 접고 PC 사업부를 분사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레오 아포테커 당시 HP 최고경영자(CEO)는 “전략적인 역량과 주주 가치 보전을 위한 결정”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덩치만 컸지 내실이 없어 아예 따로 떼어내겠다는 얘기다.

HW 누구나 '뚝딱'…글로벌 톱도 한순간에 추락

◆하드웨어 차별화 힘들어져

HP의 분사 결정은 두 달 만에 철회되긴 했지만 글로벌 정보기술(IT) 업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이 같은 양상이 빚어진 데 대해 많은 전문가들은 “PC라는 제품이 차별화가 불가능한 ‘일상재(commodity)’가 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실제 PC는 소수 업체가 생산하는 중앙처리장치(CPU) 메인보드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 광학디스크드라이브(ODD) 등의 부품을 단순 조립만 하면 되기 때문에 제품 설계 및 생산 과정에서 부가가치를 만들어내기 어렵다. 샘 팔미사노 전 IBM CEO는 2004년 자사 PC 사업부를 매각한 배경에 대해 최근 “고유성과 혁신성을 갖추기 힘들기 때문에 흑자 사업임에도 팔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소니의 PC 브랜드 ‘바이오’의 사례는 일상재화의 위험성을 잘 보여준다. 이 제품은 전문가용 방송·음향 기기에서 쌓인 기술을 바탕으로 전용 부품과 소프트웨어를 따로 개발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소니는 혁신적인 부품을 따로 개발하지 않는 대신 고급스러운 디자인과 고가 부품을 사용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꿨다. 이에 대해 장순열 한국 IDC 리서치총괄은 “반도체 성능이 좋아지면서 저렴한 가격에도 뛰어난 성능을 구현한 범용 그래픽카드·사운드카드 등이 등장한 것이 근본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더 이상 바이오만의 차별화가 불가능해진 셈이다.

◆제조사 역량 언제까지 먹힐까

문제는 스마트폰 태블릿PC 등 모바일 기기도 PC와 같은 길을 걸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모바일 기기의 하드웨어 성능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데다 구글 안드로이드 운영체제(OS)도 시간이 갈수록 안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PC처럼 표준화된 부품들을 단순 조립만하면 되는 산업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삼성전자 LG전자 등 휴대폰 업체 관계자들은 “PC와 스마트 기기는 다르다”며 “차별화된 가치를 소비자에게 제공할 여지가 많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모바일 기기 시장도 일상재화의 위험성이 상존해 있다. 태블릿PC의 경우 다수의 중소 IT업체들이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중국 IT 전문매체 ‘원패드’의 류무허 편집장은 “중국 내 노트북PC와 휴대용미디어플레이어(PMP) 제조업체 가운데 60% 정도가 태블릿PC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전한다. 제품 설계 및 생산에 높은 기술력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 업체는 CPU 디스플레이 메모리 등에서 범용 부품을 사 조립한다.

부품 성능의 평준화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지난해 하반기 출시된 LG전자 ‘옵티머스 LTE’와 팬택 ‘베가 LTE M’은 해상도 등 디스플레이 성능이 거의 같다. CPU의 경우 퀄컴 엔비디아 TI 등 3개 업체로부터 칩을 사서 끼운다. 결국 핵심 부품이나 소프트웨어만 있으면 누구든 손쉽게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을 만들 수 있는 구조다. TV는 더 쉽다. 현재 전 세계 TV 브랜드는 380여개에 달한다. 가격 경쟁력과 품질 문제만 아니라면 누구든지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분야가 TV다. 이런 상황에서 안드로이드 OS가 하드웨어업체에 대한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갈 경우 제품 차별화는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국내 업계의 한 관계자는 “가장 두려운 시나리오는 안드로이드 OS의 확산으로 모든 스마트 기기들이 PC처럼 단순 조립 제품으로 전락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은 UI(유저인터페이스)를 기기에 맞춰 수정해야 하는 등 제조업체의 소프트웨어 역량이 중요했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럴지는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조귀동/이승우 기자 claymo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