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칼럼] 재벌은 왜 죄인으로 남으려 하는가
새해가 밝았다. 희망을 얘기할 때지만 재계 분위기는 영 아니올시다이다. 대기업들의 연말연시는 우울하다. 실적이 나빠서, 올해 경기전망이 나빠서가 아니다. 선거의 한 해를 어떻게 넘길지가 그 어느 때보다 큰 두려움으로 다가와서다. 재계가 느끼는 이번 선거는 그만큼 다르다. 몇 가지 상징적인 일이 있었다.

우선 신생 민주통합당의 ‘좌클릭’이다. 중도우파 성향의 민주당이 좌파 정당과, 그것도 열세적 입장에서 신당을 구성하다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왼쪽으로 가버렸다. 법치와 시장경제라는 표현을 보수적이라는 이유로 강령에서 빼버리려다 그냥 뒀다지만 ‘재벌 개혁’이라는 네 글자를 강령에 뚜렷이 새겼다. 이합집산의 또 다른 조합인 통합진보당은 강령에 아예 ‘재벌 해체’를 넣었다지만 비할 바가 아니다. 민주통합당은 집권 가능한 정당이다. 벌써 야당 성향의 신문에는 재벌 해체를 주장하는 글이 줄을 잇고 있다. 노무현 정권 시절 고위직을 맡았던 한 학자는 심지어 삼성과 현대자동차가 사라져야 우리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주장까지 펴고 있다. 정권이 바뀌면 또 한 번 완장을 찰 인물이다.

그러면 재계가 한나라당에 기대면 될까. 이젠 불가능해 보인다. “재벌 개혁은 한나라당이 부자정당이라는 오명을 씻을 수 있는 기회”라는 주장이 나올 때만 해도 그러겠거니 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정권 재창출의 미션을 받은 비상대책위원회가 ‘재벌 개혁’ 카드를 들고 나왔다. 당 강령이 뭔가. 당의 헌법이다. 보수 집권당마저 이렇다면 재계가 비빌 언덕은 아무데도 없다고 봐야 한다. 재벌은 이제 개혁과 해체의 대상일 뿐이다.

외환위기 이후 30대 그룹 가운데 10개가 넘는 그룹이 해체의 길을 걸었다. 남은 기업들은 적자사업을 매각하고 핵심역량에 집중하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투명경영과 함께 기업지배구조도 개선했다. 그렇게 쌓인 역량이 2008년 한국이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가장 빨리 탈출할 수 있는 바탕이 됐다. 글로벌 재정위기 속에서 꿋꿋이 버틸 수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대기업이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어서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간 곳이 없다. 재벌은 그저 중소기업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다. 고환율 정책의 과실을 혼자 따먹고 ‘트리클다운 효과’까지 독식한다. 오너들은 정운찬 씨 말마따나 ‘교체되지 않는 무소불위의 경제권력’일 뿐이다.

고립무원이다. 재계 스스로도 왜 이 지경이 됐는지 답답할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라. 여론이 등을 돌리고, 결과적으로 모든 정당이 등을 돌릴 때까지 재계는 무엇을 했는지. 반기업 정서를 풀어내는 데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말이다. 국민들에게 한국 땅에 왜 재벌이란 게 불가피하게 생겼고, 어떻게 한국 경제를 성공의 반열에 올려놓았는지, 어떤 진화 과정을 거쳐 다른 기업에 비해 우월한 성과를 내는지를 제대로 설명해 봤는가. 대기업의 협력사로 출발해 글로벌 기업이 된 그많은 중소기업의 성공스토리는 어디로 사라지고 없는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그렇지 않다. 하나둘 이해를 시켜야 한다. 합리적인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며칠 전 안타깝게 별세한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야권에서도 가장 합리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재벌관은 주변 사람들과 사뭇 달랐다. 재벌은 자본주의 후발국인 한국이 거대 투자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낸, 나라의 운명을 건 작품이었다고 평가한다. 겨우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는 재벌을 해체해서는 한국이 국가경쟁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김근태 같은 인물을 잃은 것을 안타까워만 할 일이 아니다. 제2, 제3의 김근태가 나올 수 있도록 뛰어다녀야 한다. 줏대를 갖고 국민들을 이해시키고 남은 과제를 함께 풀어가야 한다. 쓸데 없는 일로 좌파 언론에 휘둘릴 필요도 없다. 대한민국을 먹여살리면서 왜 포퓰리즘의 제물이 되고, 개혁과 해체의 대상으로 남으려 하는가.

김정호 < 수석논설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