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과 변화의 '동방정책'…독일 '통일의 문' 열다
“독일에는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합니다. 독일 민족은 협력해야 합니다.”

1969년 10월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는 취임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동독을 정상적 국가로 인정하겠다는 얘기였다. ‘서독이 모든 독일을 대표한다’는 기존 입장을 뒤집은 것이었다. 정가는 논란에 휩싸였다. 우파는 조국의 배반자, 좌파는 사회주의의 배신자라고 비난했다. 독일 통일과 유럽 평화의 초석을 쌓은 아젠다인 ‘동방정책(Ostpolitik)’은 이렇게 시작됐다.

브란트는 정치권보다 국민의 변화하는 마음을 읽고 이 정책을 밀고 갔다. 경제 성장 이후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고 싶어하는 국민들의 뜻을 기반으로 동독에 다가간 것이다. 시대의 아젠다는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그의 퇴임 이후에도 기독민주당의 헬무트 콜 총리가 이어받아 1990년 통일을 완성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독일 국민들은 콜 총리가 아니라 26년 전 퇴임한 브란트를 칭송했다.

◆아젠다, 치밀한 정책으로 뒷받침

브란트가 총리 취임 후 내린 첫 번째 중대 결정은 마르크화 가치를 절상한 것이다. 통화가치를 높이면 제조업 경쟁력이 떨어진다. 독일에는 불리한 일이다. 이는 그동안 독일이 거둔 경제적 성과를 다른 국가들과 나누겠다는 뜻이었다. ‘동방정책은 단순히 독일 통일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포석이었다. 유럽 전체의 평화를 목표로 한 것이다. 이어 1970년 소련과 상호 무력을 포기하고 현행 국경선을 인정하는 조약도 체결했다. 그해 3월에는 분단 이후 처음 동독을 방문, 정상회담을 가졌다. 당시 동독 시민들은 경찰의 제지선을 뚫고 브란트를 환영할 정도였다.

브란트의 동쪽을 향한 행보는 폴란드로 이어졌다. 그는 1970년 12월7일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의 유태인 기념비를 방문했다. 1943년 나치에 희생당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브란트는 헌화한 뒤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빗물이 흥건한 바닥에 돌연 무릎을 꿇은 뒤 30초간 양손을 맞잡고 머리를 숙였다. 이 장면은 이후 ‘세기의 사죄’로 불렸다. 독일을 대표해 사죄한 것이다. 언론들은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었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고 평가했다. 전범 독일 총리의 진정한 사죄를 유럽인들이 진심으로 받아들였다는 의미다. 브란트는 또 ‘바르샤바 조약’을 맺고 국경선을 ‘오데르-나이세 선’으로 확정했다. 독일 헌법상 동독이 자국 영토인 가운데 폴란드에 국경선 양보 결정을 내린 것. 독일제국 시절에 비해 영토는 훨씬 줄어들었다. 독일 내에서는 반대 목소리가 나왔다. 그는 “다른 나라의 희생을 대가로 더 이상 영토를 확장하지 않겠다”고 단호히 말했다.

◆국민의 이름으로

이런 동방정책은 순탄치 않았다. 살해 위협도 당했다. 특히 야당(기독민주당)은 브란트의 동독 지원에 대해 “일방적 지원은 동독 정권을 공고히 하는 동시에 서독 전복 활동을 방조하는 것”이라며 맹공을 펼쳤다. 급기야 1972년 4월 총리 불신임 투표가 실시됐다. 불신임은 2표 차로 부결됐다. 하지만 연립여당인 사회민주당과 자유민주당 일부 의원들이 동방정책에 반기를 들어 예산안 통과가 불가능한 상황에 처했다. 브란트는 국민들에게 기댔다. 의회 해산과 재신임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빌리를 뽑자”는 외침이 번져갔다. 평화를 향한 브란트의 진정성에 민심이 움직였다. 그가 재신임을 받으며 동방정책은 위기에서 살아났다.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브란트는 국민의 움직이는 마음을 정확히 읽고 자신의 아젠다를 제시했으며 어려울 때도 국민에게 그 뜻을 물은 것이 성공 비결”이라고 평가했다.

재신임 후 브란트는 동독과 무력 사용 금지, 협력과 교류 등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기본 조약을 맺었다. 이어 동·서독 유엔 동시 가입까지 성사시켜 통일의 기초를 마련했다.

◆외교적 포용으로 주변국과 긴장 완화

공존과 변화의 '동방정책'…독일 '통일의 문' 열다
1971년 냉전을 해소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후 브란트는 “사람들에게 특정 체제를 강요하는 것은 인간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인간의 변화 가능성을 믿고 있다”고 말했다. 동방정책과 ‘접근을 통한 변화’라는 그의 아젠다가 인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결과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이다.

그의 아젠다는 불행한 삶의 여정으로 보면 필연적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의 본명은 헤베르트 에른스트 칼 프람이다. 1913년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사생아로 태어났다. 가난한 노동자 계급 출신으로 사회민주당원으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자 노르웨이로 망명했다. 이때 스스로 지은 가명이 빌리 브란트였다. 이를 평생 사용했다. 1948년 독일 국적을 취득하고 베를린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베를린 시장 시절 얻은 경험은 그의 동방정책의 또 다른 뿌리가 됐다. 1961년 자신의 눈앞에서 베를린 장벽이 올라가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분단이 주는 마음의 상처가 동방정책의 밑거름이 된 셈이다.

그는 1974년 간첩 사건으로 퇴임했지만 동방정책이란 아젠다와 함께 독일의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 남아 있다. 1999년 게르하르트 슐츠라는 사람은 베를린 사회민주당에 250만유로를 후원금으로 내면서 브란트 곁에 묻어달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이서원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김진수 기자 true@hankyung.com
공존과 변화의 '동방정책'…독일 '통일의 문' 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