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록] 한류, 홍콩영화꼴 안나려면
지난 10월 부임한 심동섭 주일 한국문화원장은 일본에 오자마자 동일본 대지진 피해지역에서 ‘K팝 공연’을 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지진이 터진 지 반년 이상 지났는데도 한류스타들이 피해지역에서 대규모 공연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은 직후다. 일본의 한류붐을 지속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도 섰다.

곧바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한류스타들이 소속된 일본 내 기획사들마다 전화를 돌렸다. 그러나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모든 기획사들이 고개를 저었다.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마뜩찮아 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스케줄이 꽉 차 있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취재여록] 한류, 홍콩영화꼴 안나려면
대부분의 한류스타들은 일본 내 기획사와 별도의 계약을 맺는다. 일본에 진출하는 프로야구 선수처럼 일정 기간 한류스타를 임대하는 형식이다. 비싼 돈을 들여 한국 가수와 배우를 영입한 일본 기획사 입장에서는 단기간에 많은 수익을 올려야만 본전을 뽑을 수 있는 구조다.

일본 진출을 준비 중인 한 기획사 관계자는 “스타들 중에서도 원전 사고 지역에서 열리는 공연을 꺼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했다. 국내 모 방송사가 한때 지진 피해지역에서 한류 행사를 기획하기도 했지만 무산됐다.

심 원장은 일본에 아직 본격적으로 진출하지 않은 스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걸스데이’ 등 몇몇 신인 그룹들이 동참하기로 했다. 이들은 주일 한국문화원 주최로 오는 15일 지진 피해를 입은 지역 중 하나인 미야기(宮城)현 센다이(仙台)시에서 공연한다. 대지진 이후 9개월 만에 동일본 지역에서 사실상 처음 열리는 대규모 ‘K팝 공연’인 셈이다. 다만 일본인들에게 익히 알려진 초특급 한류스타들은 빠졌다.

1980년대 한국은 홍콩 스타들의 천국이었다. 주윤발 왕조현 등의 스타들이 어색한 한국말을 하며 국내TV 광고를 휩쓸었다. 그러나 10년을 못갔다. 거짓말처럼 홍콩 스타들의 영향력은 한 순간에 사라졌다. 심 원장은 “지금 일본에서 일고 있는 한류붐이 홍콩의 전철을 밟지나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문화산업은 마음을 얻는 비즈니스다. 대지진 지역을 찾는 한류스타는 일본인들의 주목을 받을 확률이 높다. 센다이에서 열리는 이번 행사에 일본 최대 방송국 NHK가 흔쾌히 따라가겠다고 한 이유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안재석 도쿄 특파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