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봇대'는 살아있다] 규제는 '나의 힘'…지자체는 오늘도 '족쇄' 만든다
규제개혁위원회가 처음 설치된 것은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직후다.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도 취임 초기 “기업의 발목을 잡는 규제 전봇대를 뿌리뽑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산업현장에서 기업들이 느끼는 만족도는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세 정권을 거쳐 14년간이나 ‘규제개혁’을 외쳐왔는데도 성과는 미미하다.

기업들과 규제개혁 담당자들은 중앙정부부처와 지방자치단체의 ‘권한 넓히기’ 다툼과 규제를 당하는 소비자보다 공급자 중심의 정책 시행 관행이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법보다 무서운 장관 고시와 훈령

정부부처가 새로운 법을 만들거나 고치려면 반드시 국무총리실 규제개혁위원회의 심사를 거쳐야 한다. 법제처와 대통령 직속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도 불필요한 규제를 없애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럼에도 산업현장의 기업들이 느끼는 만족도가 확실하게 나아지지 않는 것은 어디선가 규제가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상위법’만 관리가 된다는 점이다. 법률, 대통령령, 총리령 등은 규개위와 국무회의 등을 거치면서 심사를 받는다. 하지만 각 부처 장관이 임의로 만들 수 있는 고시·훈령·예규 등의 행정규칙은 거의 방치돼 있다. 법제처가 사후 관리를 하지만 부처 입장에서는 적발돼도 별 다른 불이익이 없고 다른 명목으로 또 다른 규제를 만들면 그만이다.

법제처는 이명박 정부 들어서만 1016건의 규제성 행정규칙을 적발했다. 규개위 관계자는 “기업 활동을 직접 옥죄는 규제인데도 누가 왜 그 같은 훈령·예규를 만들었는지 기록이 남지 않고 처벌 규정도 없기 때문에 관리가 어렵다”고 말했다.

○지자체가 무섭다…현장 규제의 산실

기업들은 지자체 규제가 무섭다고 했다. 인·허가권과 같은 규제는 지자체의 세금 수입은 물론 공무원들의 이런저런 권한과 직접 연관돼 있다. 때문에 지자체들은 좀처럼 이를 줄이려고 하지 않는다. 이렇다 보니 대통령이나 중앙정부가 아무리 규제개혁을 외쳐도 현장에선 체감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 중앙정부의 규제개혁 작업은 상위법에만 국한되기 때문이다. 상위법이 규제를 푸는 방향으로 바뀌어도 지자체에서 자치법규를 바꾸지 않으면 현장에선 혜택을 입을 수 없다. 중앙정부가 관여하려 해도 “지방자치제를 무시하는 거냐”며 반발하면 방법이 없다.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가 주요 법안들을 대상으로 표본조사한 결과 절반 정도의 지방자치단체만 상위법 취지에 맞게 조례·규칙을 만든 것으로 나오기도 했다. 지방의 한 중소기업 사장은 “상위법이나 조례·규칙이나 기업 입장에선 똑같은 법일 뿐”이라며 “정부가 규제를 완화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지자체에 연락하면 아예 내용도 모르거나 관련 자치법규를 바꾸려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토로했다.

○부족한 두 가지…책임의식과 전문성

지자체의 역량 부족도 규제개혁의 걸림돌로 꼽힌다. 경기도 광명시에 아파트형 공장을 짓고 있는 SK건설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SK건설은 최근 광명시로부터 취득세와 등록세 20억원을 내라는 통보를 받았다. 광명시 조례는 공장 건설을 위해 토지를 취득한 후 2개월 안에 등기를 해야 취·등록세를 면제한다고 규정했는데 SK건설이 이를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SK건설 관계자는 “아파트형 공장은 토지 취득 후 지번을 획득하는 데 몇 달이 걸리기 때문에 두 달 만에 등기를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며 “분명히 시에 확인받고 공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광명시 측도 “착오가 있었다”고 시인했다. 광명시는 현실에 맞지 않는 조례를 만들었고, 담당자는 이런 조례가 있었던 것조차 몰랐다는 얘기다.

한 지자체 관계자는 “지역 기업인들의 문의 내용 가운데는 솔직히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를 때가 많다”며 “책임을 피하고 혹시 있을지 모르는 감사원 감사에 대비하기 위해 무조건 ‘중앙정부에 문의하라’고 떠넘기는 경우도 있다”고 털어놨다.

법제처 관계자는 “다른 지자체가 엉성하게 만든 조례를 그대로 베꼈다가 두 지자체가 같은 이유로 소송에 휘말리는 사례도 있다”고 전했다.


◆ 전봇대

불합리한 정부 규제를 상징하는 말로 통용된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이던 2008년 1월 18일 “대형 트레일러가 커브길 옆 전봇대 때문에 제대로 운행할 수 없다는 목포 대불공단 기업들의 민원을 지자체와 정부가 몇 달째 묵살했다”며 공무원들의 탁상행정식 업무 처리를 강도 높게 질타한 게 계기다.

남윤선 기자 inkling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