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尙有十二(아직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1597년, 정유재란. 왜군이 밀려오는데 대적할 배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걱정하는 선조에게 이순신 장군은 이런 장계를 올렸다. 133척의 적군이 몰려왔지만 장군은 자신의 배까지 총 13척을 끌고 나아갔다.

이곳이 전남 해남의 진도대교 아래 바다, 울돌목이다. 바닷물이 울리며 돌아나가는 목이라는 뜻이다. 빠른 물살을 이용한 수공으로 명량대첩의 기적적인 승전보를 날리게 한 장소다. 500년이 지난 요즘에도 적조가 생기지 않고 깨끗한 수질을 유지하고 있다.

서울 서초동에 이곳의 이름을 딴 해산물 밥집 ‘울돌목 가는 길’이 있다. 권혁세 금융감독원장이 비장한 이름의 식당을 고른 데는 복잡한 뜻이 담긴 것 같았다.

“한경에서 ‘맛있는 만남’을 한다기에 어디 갈까 궁리를 좀 했어요. 여기가 참 좋습니다. 이름도 좋고, 굉장히 건강식입니다. 언제나 해산물이 싱싱하고. 가격도 점심 때는 1인당 2만원 아래로 정말 푸짐하게 먹을 수 있어요. 아내와 주말에 종종 오는 곳이라 한번 소개해주고 싶습니다.”

상에는 톳 쇠미역 꼬시래기 다시마 모자반 같은 해초류가 뭉터기씩 올려져 있었다. 갈치젓을 묻혀 김에 싸서 먹으면 바닷내가 풍겼다. 계란 노른자를 얹고 깨와 참기름을 뿌린 산낙지가 사람마다 한 종지씩 나와 입맛을 돌게 했다.

○“한동안 얼굴 들고 다니기 힘들었다”

“소맥(소주+맥주) 할래요, 화랑 할래요?”

권 원장이 물었다. “요즘에는 독한 술은 못 먹겠더라고요. 이런 가벼운 술이라든지, 포도주도 그런 대로 좋지만요.” 주종은 화랑으로 결정됐다. 마침 나온 꼬득한 전복, 세꼬시와 잘 어울렸다.

권 원장은 지난 3월 취임했다. 취임 후 곧 부산저축은행 사태가 불거져 금감원은 쑥대밭이 됐다. 매일 검찰에 직원들이 불려 나갔다. 구속되는 이들도 나왔고 자살하는 이도 있었다. 지난 5월4일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금감원에 예고없이 찾아와 크게 질타했다.

“나는 내정자로 한 두 달 있었습니다. 그 사이 취임하면 어떻게 해야겠다, 이런 구상을 갖고 왔는데 막상 이런 변수가 꽝 터지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더라고. 온갖 곳에서 금감원을 비난하고. 내가 참 얼굴을 들고 다니기 힘들 정도였죠.”

조직의 장(長)으로서 직원들을 추스르는 게 급선무였다. “직원들이 모두 망연자실해 있었어요. 할 일이 많은데 이렇게 넋 놓고 있는 사이 또 다른 부실이 일어날 수 있다고 다독였습니다.”

그는 일단 대규모 인사 조치를 단행했다. ‘근원적인 DNA 개조’를 표방한 인사로 국·실장의 85%, 팀장급의 51%를 자리바꿈했다. 은행·증권·보험·저축은행 등 업권별로 사람을 대거 섞어버렸다. 금감원 임직원이 퇴직 후 금융회사 감사로 가는 관행 폐지, 재산등록 대상 확대 등의 자체 개혁안도 내놨다. 직원들의 볼멘소리가 나왔지만 그런 걸 가릴 때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必死卽生 必生卽死(살려고 하면 죽고 죽으려 하면 산다)’는 심정이었다.

상반기에 조사하지 않은 85개 저축은행을 전부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금감원 직원 182명과 예금보험공사 회계법인 직원 등 모두 338명이 7월부터 두 달간 매달렸다. “원래는 2분기에 몇 개, 3분기에 몇 개 이런 식으로 조사 계획이 있었지만 신뢰가 땅에 떨어진 상황을 극복하려면 한꺼번에, 전부 해야겠더라고요.”

상급기관 금융위원회에서는 처음에 반대했다. 대형 저축은행 부실이 터지면 또 통제불능의 사태가 올까 걱정했다고 했다. “우리 직원들도 독이 올라 있었어요. 저축은행의 문제를 낱낱이 뒤졌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잘 됐습니다. 질서정연하고 치밀하게 해냈어요. 이제 우리 직원들은 어느 저축은행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다 압니다.”

금융위와 금감원은 전수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지난 9월 제일저축은행 등 7개 저축은행을 추가로 영업정지시켰다. 또 6개 저축은행은 연말까지 자구계획을 내도록 했다. 대형 저축은행이 포함됐지만 충격은 전보다 훨씬 약했다.

○“소비자 보호, 조직만 만든다고 되나”

하지만 금감원의 내상은 깊었다. 금감원 임직원들은 세간의 따가운 시선이 지나치다고 느끼고 있었다. 부실 저축은행이 자라날 토양을 닦은 정책 입안자들은 뒷짐 지고 모른 체하는데 ‘관리감독 책임’만 강조하는 것이 억울하다는 분위기도 없지 않았다.

음식을 들던 권 원장이 담배를 청해 불을 붙였다. “평소엔 거의 피우지 않았는데…. 사실 처음보다도 최근 한 달이 제일 힘들었어요. 금융소비자보호원(금소원) 문제 하고 직원들 취업 제한 문제 때문에.” 금융위는 지난 16일 금감원 내에 금소원을 설치, 사실상 2개 조직으로 분리하는 금융소비자보호법을 확정했다. 지난달 말에는 금감원 직원의 재취업을 제한하는 공직자윤리법이 발효됐다.

“바깥 문제는 장이 어떻게 하면 되지만 내부 자식들 문제는 정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고. 안과 밖의 온도 차가 너무 큽니다. 바깥에서는 아직도 싸늘한 시선이 바뀌지 않고, 금감원 직원들이 무소불위 권한을 누리고 있다고 하는데…. 직원들은 문제된 몇을 빼곤 나름대로 깨끗하게 살았는데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서러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비자 보호를 언제 안 하려 했는가 말이죠.” 잠시 뜸을 들인 권 원장은 “소비자 보호는 자세가 중요한 거지 조직만 만들어서 되는 일은 아니다”고 덧붙였다. 말 속에 뼈가 있었다.

두입거리로 큼직큼직 썰어내 익힌 뒤 검은깨에 굴려낸 마가 올라 왔다. 술이 한 순배 돌았다. “어쨌든 국민들 눈높이가 아직 이렇게 차가운 거야 하고 얘기를 하려 해도 (금감원) 노조에서는 또 데모를 하고 벽보를 붙이고 합디다. 몇 개월간 우리가 숨죽여가며 제일 힘들게 이미지 개선한 돌탑이 다 무너지는 게 느껴져요. 하지만 젊은 직원들 혈기는 또 다르니까 속상하더라고요.” 그는 이런 복잡한 심경을 담은 편지를 최근 직원들에게 보냈다.

○“금융사기 뿌리 뽑고 간다”

직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권 원장은 ‘피해자 심정’을 강조했다. “언제부터인가 직원들이 일을 쉽게 하고, 무슨 보이스피싱 같은 게 생기면 일단 금융회사 얘기를 들어보고 ‘그렇습니까?’ 하고 수긍하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그러지 말아야 박수를 받는데…. 내가 돈을 잃은 피해자라는 생각으로 해야 된단 말입니다.”

○ “취임 직후 저축銀 사태…얼굴 들고 다니기 힘들었죠”

그는 “어떤 감독체계가 되든 금감원의 역할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생각하는 금융감독은 무엇일까. “금융감독은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금융회사 건전성 감독이고 다른 하나는 금융소비자 보호입니다. 특히 소비자보호는 기본, 머스트(must)입니다. ”

거기에 조금 더 보탰다. “금융감독에 요구되는 시대적인 사명이 있어요. 내가 보기에 지금 우리의 시대적 사명은 서민금융을 활성화하고, 금융회사의 사회적 책임을 강화하고, 준법윤리 경영을 하도록 하는 겁니다. ”

특히 최근 금융회사들의 행태에 대해 그는 어지간히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앞으로 금융악과의 ‘전쟁’을 벌일 참입니다. 테마주·작전주, 보험사기, 금융사기, 보이스피싱, 대부업체, 이런 것들이 서민들의 피를 빨아먹습니다. ”

대출 시장에서 금리 거품을 빼야 한다는 주장도 폈다. “우리나라 대출은 은행의 연 10% 미만 저금리와 대부업체와 여신전문회사(카드·캐피털)의 연 30% 이상 고금리 두 가지 시장밖에 없습니다. 러시앤캐시 같은 대형 대부업체 고객 10명 중 4명은 신용등급이 1~6등급입니다. 그런데도 대부업체들은 이 사람들한테 연 30% 넘는 금리를 받아요. 은행이 자회사를 설립해서라도 중간 층을 포괄하는 대출상품을 만들면 대부업체도 이런 고금리를 못 받을 겁니다. ”

중소기업 금융과 관련해서 김석동 위원장이 ‘1박 2일’ 현장 투어를 간 것은 “컨셉트를 참 잘 잡았다”며 박수를 보냈다. “우리도 박수 받을 일 하려고요. 군부대 가서 금융교육 하고, 대학 찾아가 ‘금융토크’도 하고 그러려고 합니다. ”

○ 이런 애처가,또 없습니다

매운 낙지볶음과 고추장을 얹어 지진 코다리, 매콤한 서더리탕이 잇달아 나왔다. 양념이 강한 음식이 나오자 권 원장도 양념 같은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1982년 결혼한 후 30년간 이어온 아내와의 데이트 얘기였다.

“와이프하고 토요일엔 점심 저녁을 항상 같이 먹어요. 아침부터 산에 가고, 아니면 어디 둘레길 산책이라도 하고 맛있는 집 가서 외식하는 겁니다. ”

부산세무서에 근무하며 신혼생활을 할 때는 매일 퇴근 무렵 아내가 세무서 앞 다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퇴근종 땡 치면 둘이 손잡고 부산의 맛집을 찾아다니는 게 일이었죠. ”

지금도 그는 아내를 위해 주말마다 새로운 데이트 코스를 발굴하려 노력한다. 맛집을 만나면 아껴뒀다가 꼭 아내와 같이 다시 간다고 했다. 울돌목도 그런 곳 중 하나다.

한참 이야기가 무르익어가는데 미역을 넣어 끓인 떡국이 올라왔다. 마지막 코스였다. 슬쩍 “세간에선 정치에 관심이 있다는 얘기가 돈다”고 물었다. 정색한 답이 돌아왔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누가 하나요. 금감원에 온 지 7개월 밖에 안 됐는데. 그간 잃었던 금감원 신뢰를 회복하는 것도 하고 가야 하는데 그것만도 시간이 모자라요. 이 자리에서 매진할 겁니다. ”


■ 권혁세 금감원장의 단골집 울돌목 가는 길

해산물 전남서 직접 공수 … 전복회 '별미'

해산물 밥집이다. 전남 울돌목에서 올라온 해조류와 전복, 회 등이 늘 싱싱하다. 식전에 알로에 조각을 내고 세꼬시도 뼈 있는 것과 없는 것 2종류로 준비하는 등 차별화를 꾀했다.

점심 메뉴로는 코다리정식(1만6000원), 낙지·게장정식(2만원), 세꼬시정식(2만7000원) 등이 있다. 저녁에는 해초칠절판 세꼬시 전복 낙지볶음 도다리미역국 코다리 황새기조림 홍어찜 등이 나오는 울돌목정식(3만8000원)이 기본이다.

여기에 산낙지탕 전복구이 등을 추가하면 한산도정식(5만5000원), 연포탕까지 더해지면 우수영정식(7만5000원)이다. 점심은 낮 12시부터 오후 2시30분까지, 저녁은 오후 6~10시 사이에 영업한다.

서울 서초역 2번출구에서 100여m 내려가서 왼쪽으로 꺾어들면 1호점이 있다. 삼성동 코엑스인터컨티넨탈호텔 근처에 2호점을 냈다. 서초동점 전화 (02)521-6032

정리=이상은/류시훈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