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록] 불신 자초한 정부
"여야 간사 간 합의에 따라 21일 보건복지위원회 전체회의에 감기약 슈퍼 판매를 허용하는 법안을 상정시키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제가 직권상정할 생각도 없고요. "

국회 복지위 이재선 위원장은 지난 16일 밤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약사법 개정안을 이번 정기국회의 마지막 상임위 전체회의에 상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그동안 논란이 됐던 감기약 슈퍼 판매는 이렇게 무산됐다.

감기약 슈퍼 판매 허용은 이명박 대통령이 여러 차례 국민에게 약속한 아젠다였다. 이 대통령은 지난 6월7일 복지부가 감기약 · 소화제 등 일반의약품(OTC)의 슈퍼마켓 판매를 유보한 데 대해 "국민의 편익을 고려해야 한다"며 재검토를 지시했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복지부 업무보고에서도 "미국에서는 슈퍼마켓에서 감기약 같은 것을 사먹는데 한국은 어떠냐"며 일반의약품의 슈퍼마켓 판매 허용을 거듭 강조했다.

이 대통령과 정부가 그토록 여러 차례 약속했던 약사법 개정이 무산됐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입김이 강한 약사회의 눈치를 본 국회가 정부 입법에 제동을 건 것이다. 대한약사회의 국회 입김은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활동회원만 3만여명에 월급약사 등 등록회원을 모두 합하면 6만명에 이른다. 이런 터에 정치권이 총선 전에 약사법 개정에 손 댈 가능성은 낮다. 내년 5월 말 임기가 끝나는 18대 국회 내 개정안의 처리는 물 건너 간 셈이다.

정부는 국회를 탓하고 싶어하겠지만,책임론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복지부의 책임이 크다. 복지부는 약사법 개정에 반대하는 국회와의 사전 의견 조율 없이 일방적으로 개정안을 발표한 뒤 밀어붙였다. 지난 9월27일 국정감사 때도 상당수 여야 의원들은 약사법 개정안을 반대하며 "의약품 부작용 감시를 강화하는 등의 제도 개선책을 마련해올 것"을 정부에 요구했다. "개정안을 통과시킬 의지가 있었다면 사전에 의원들을 설득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아마추어 정부와 국회의 직무유기에 따른 불편은 고스란히 국민들 몫이다. 국민 10명 중 8명이 찬성하는 의약품 슈퍼 판매가 무산된 데 대해 정부와 국회는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 국민의 정치혐오증엔 다 이유가 있다.

허란 정치부 기자 w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