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의 곁에 두고 싶은 책] 힘들어 주저앉은 그대를 향한 조선 최고 기생의 '무거운 일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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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황진이 / 김탁환 지음 / 푸른 역사 / 346쪽 / 1만5000원
"세상엔 자기를 완성시켜 가는 인간과 자기를 파괴시켜 가는 인간이 있습니다. 시간을 따라 늙는다는 건 자신의 삶을 앙상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지요. 한 순간의 만족도 허락해선 안됩니다. 여유를 포기하고 자신을 몰아쳐야지요. 외롭다구요. 물론 외로운 길입니다. 힘겹다구요. 물론입니다. 성인의 경지를 논하지 않더라도 자신을 믿기는 쉽지 않지요. "
16세기 시인 황진이의 말은 배반의 세월에 지쳐 주저앉고 싶은 이들에게 '정신 차리고 일어서라'고 다그친다. '나,황진이'는 내용과 형식 모두 독특하다. 작가는 황진이를 한낱 글재주나 있던 기생이 아니라 화담학파의 대모겸 10년 간 서경덕의 문하를 지킨 지식인으로 되살렸다.
게다가 오랜 통설을 뒤엎는 그같은 해석을 위해 각종 사료(史料)와 시문(詩文)을 찾아 600여개의 주석을 붙였다. 글은 스승 화담(花潭,꽃못) 서경덕이 세상을 떠난 뒤 쉰줄에 든 황진이가 같은 문하생이었던 허태휘를 향해 적는 회고록 형태를 띤다. 허태휘는 허균과 허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이다. 태휘는 자(字).
나(황진이)는 출생부터 기생으로서의 삶,연인 이사종 및 이생과의 만남과 이별,지족선사와 서화담에 얽힌 풍문까지 모두 해명한다. 가장 많은 건 새끼할머니(작은 외할머니) 진백무와 어머니 진현금 및 외숙부에 대한 부분.새끼할머니는 춤에 뛰어난 송도의 행수 기생,어머니는 맹인이었으나 송도 제일의 현수(絃首),외삼촌은 학문에 능한 아전이었다.
연모하다 죽은 서생 때문에 기생이 됐다는 건 턱없는 낭설이라고 일갈한다. 열여섯에 관기가 된 후 솜씨가 소문나면서 큰돈을 만졌다는 그는 평생 노래와 시에 능한 이 외에 거상(巨商)을 상대한 이유도 밝힌다. "돈이든 시문이든 춤과 노래든 범인이 감히 넘보지 못할 수준에 올랐다면 배울 바가 적지 않지요. "
한양 제일의 소리꾼 이사종을 만난 건 관기를 그만둔 뒤였으며 6년 만에 헤어진 건 천포창(매독)에 걸린 어머니를 살려보려 애쓰다 전 재산을 날린 다음이었다고 털어놓는다. 지족선사와 서화담에 관한 얘기는 사대부들이 지어낸 터무니없는 거짓이라고 항변한다. 서경덕 문하에 든 건 지족선사의 꼿꼿함보다 자신의 뜻에 반하는 이들까지 품는 화담의 넉넉함에 공감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잊혀진 우리말과 고풍스런 한자어를 발견하는 덤도 있는 책엔 이런 말도 보인다.
"물러나 살피는 것이 반드시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긴 유랑을 마치고 난 후에야 알았답니다. 편안한 곳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겠으나 변하면서 흔들리고 위험이 도사린 곳에서 얻는 깨달음이야말로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니까요. "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
16세기 시인 황진이의 말은 배반의 세월에 지쳐 주저앉고 싶은 이들에게 '정신 차리고 일어서라'고 다그친다. '나,황진이'는 내용과 형식 모두 독특하다. 작가는 황진이를 한낱 글재주나 있던 기생이 아니라 화담학파의 대모겸 10년 간 서경덕의 문하를 지킨 지식인으로 되살렸다.
게다가 오랜 통설을 뒤엎는 그같은 해석을 위해 각종 사료(史料)와 시문(詩文)을 찾아 600여개의 주석을 붙였다. 글은 스승 화담(花潭,꽃못) 서경덕이 세상을 떠난 뒤 쉰줄에 든 황진이가 같은 문하생이었던 허태휘를 향해 적는 회고록 형태를 띤다. 허태휘는 허균과 허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이다. 태휘는 자(字).
나(황진이)는 출생부터 기생으로서의 삶,연인 이사종 및 이생과의 만남과 이별,지족선사와 서화담에 얽힌 풍문까지 모두 해명한다. 가장 많은 건 새끼할머니(작은 외할머니) 진백무와 어머니 진현금 및 외숙부에 대한 부분.새끼할머니는 춤에 뛰어난 송도의 행수 기생,어머니는 맹인이었으나 송도 제일의 현수(絃首),외삼촌은 학문에 능한 아전이었다.
연모하다 죽은 서생 때문에 기생이 됐다는 건 턱없는 낭설이라고 일갈한다. 열여섯에 관기가 된 후 솜씨가 소문나면서 큰돈을 만졌다는 그는 평생 노래와 시에 능한 이 외에 거상(巨商)을 상대한 이유도 밝힌다. "돈이든 시문이든 춤과 노래든 범인이 감히 넘보지 못할 수준에 올랐다면 배울 바가 적지 않지요. "
한양 제일의 소리꾼 이사종을 만난 건 관기를 그만둔 뒤였으며 6년 만에 헤어진 건 천포창(매독)에 걸린 어머니를 살려보려 애쓰다 전 재산을 날린 다음이었다고 털어놓는다. 지족선사와 서화담에 관한 얘기는 사대부들이 지어낸 터무니없는 거짓이라고 항변한다. 서경덕 문하에 든 건 지족선사의 꼿꼿함보다 자신의 뜻에 반하는 이들까지 품는 화담의 넉넉함에 공감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잊혀진 우리말과 고풍스런 한자어를 발견하는 덤도 있는 책엔 이런 말도 보인다.
"물러나 살피는 것이 반드시 나쁘지만은 않습니다. 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긴 유랑을 마치고 난 후에야 알았답니다. 편안한 곳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겠으나 변하면서 흔들리고 위험이 도사린 곳에서 얻는 깨달음이야말로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니까요. "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