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的 몸짓ㆍ흑백 의상ㆍ미니멀 무대…영화 같은 발레
독약을 먹고 쓰러져 있는 줄리엣을 본 로미오는 강렬한 입맞춤으로 그녀를 일으켜 세워보지만 그녀는 이내 맥 없이 처지고 만다. 줄리엣(김주원,김지영 분)의 죽음을 확인한 로미오는 무대 반대편에서 애통해하는 춤을 추다 줄리엣이 누워있는 검정 단의 모서리를 향해 달려간다. 로미오(이동훈,아시에르 우리아게레카 분)가 바닥에 미끄러지며 단상 끝에 심장을 찔릴 때 줄리엣은 독약 기운에서 벗어나 눈을 뜬다. 숨이 끊어진 로미오를 흔들어 깨우던 줄리엣은 그의 몸 속에서 꺼내든 붉은 끈을 목에 감는다. 비통한 음악이 객석을 휘감는다.

정명훈 예술감독이 이끄는 서울시향과 국립발레단의 만남으로 클래식,발레 팬들의 기대를 동시에 모았던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이 27일 막을 올렸다. 포스트 클래식 발레의 명안무가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가 1996년 초연한 명작.국내에서는 국립발레단이 2002년 재공연 이후 세 번째 무대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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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엔딩 크레딧 연상

"영화 같은 발레를 만들고 싶었다"는 마이요의 말처럼 잔잔한 서곡이 흐르자 검은 막 위로 작품을 만든 사람들의 이름이 차례로 올라갔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연상시키는 이 장면이 비극의 시작을 알린다. 인간의 운명,비극적 사랑은 끝없이 되풀이된다는 것을 말하려는 연출가의 의도가 녹아 있다.

마이요는 불필요한 요소는 모두 없애는 특유의 연출 스타일로 유명하다. 이 작품에는 줄리엣의 아버지도,두 가문의 중재자 베로나 공작도 등장하지 않는다. 칼도,독약도,총도 없다. 대신 로렌조 신부(이영철 분)가 관찰자가 되기도 하고,극에 개입하기도 하면서 끌어나간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뺨을 만지다가 몸을 더듬어 올라가는 2인무 포즈,손바닥을 마주대고 손가락을 움직이며 사랑을 표현하는 장면은 아름답고 열정적인 그들의 사랑을 시적으로 전한다. 극적 장면에서는 모든 군무가 아주 느린 동작으로 움직이면서 비극을 극대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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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외에 줄리엣의 어머니 마담 캐플릿(윤혜진 분)과 사촌 티볼트(윤전일 분)의 활약이 압도적이다. 팜 파탈에서 모성애,애통함까지 모두 표현해야하는 마담 캐플릿은 뛰어난 연기력으로 많은 박수를 받았다.

◆동서양 접목한 세련된 디자인

다양한 크기의 곡선으로 이뤄진 다섯 개의 이동식 흰 패널,그 사이에 비스듬히 놓여진 길 하나가 무대 세트의 전부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만나는 무도회와 죽음에 이르는 장면에서는 검정색 구조물이 내려와 비극을 암시했다. 한줄기 달빛을 받으며 춤을 추는 줄리엣을 바라보는 로미오의 아련한 마음은 백색 패널에 투영된 파스텔 톤 조명만으로 완벽하게 표현됐다.

의상도 많은 메시지를 전한다. 줄리엣의 집안인 캐플릿 가 사람들은 검정색이 주를 이루는 의상,로미오의 집안인 몬테규 가의 사람들은 온화하고 밝은 의상으로 대비를 이뤘다. 특히 베로나 광장 무도회 장면 등 줄리엣이 주로 입는 황금빛 드레스에 대해 그는 "줄리엣은 사랑 그 자체다. 태양을 형상화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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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캐플릿은 딱 한 장면에서 토슈즈를 벗고 맨발로 뛰어나왔다. 티볼트의 죽음을 전해듣고 광장으로 뛰어나온 때다. 갑작스런 그의 죽음에 미처 신발을 신지 못하고 정신없이 뛰어나와 비통해하는 춤을 출 때 관객들은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결혼식 장면에서 '뫼비우스의 띠'를 형상화 한 소품도 눈에 띄었다.
◆프로코피예프의 극적 음악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의 작곡가 프로코피예프는 클래식 발레 음악의 스토리와 연관 없는 여흥적 요소(디베르티스망)를 배제하고 드라마를 강조한 음악을 만들었다. 전체 52곡의 음악은 연극적인 구조로 매순간 부드럽고도 극적인 힘을 가졌다.

마에스트로 정명훈은 섬세하고도 극적인 대비를 훌륭히 다듬어냈다. 민중적 음악과 귀족적인 음악이 교차하고,타악과 관악이 위압적인 힘을 만들어내는 특징을 잘 살려낸 서울시향과 국립발레단의 첫 만남은 성공적이었다. '보는 발레'에서 '듣는 발레'로 진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