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지루한 뇌
휴대폰이 없던 시절,우리는 꽤 많은 전화번호를 외웠다. 가족과 친구는 물론 자주 이용하는 동네슈퍼와 피자집 번호까지 기억했다. 내비게이션이 뭔지 몰랐을 땐 한번 가본 곳은 어디든 쉽게 찾았다. 묻고 헤매면서 가다 보면 중간중간 뭐가 있는지 훤히 꿰게 됐던 덕이다.

편리한 디지털기기 덕에 우리는 전화번호와 낯선 길 모두 기억하지 않아도 되게 됐다. 아니 기억하지 못하게 됐다. 대신 휴대폰을 통해 시도 때도 없이 들어오는 온갖 정보를 들여다봐야 한다.

휴대폰과 인터넷은 퇴근시간과 휴일도 없애 버렸다. 사무실에 있든 없든 전화를 받고 이메일을 확인해 일을 처리해야 하는 까닭이다. 스마트폰은 더하다. 차 안에서도 인터넷을 이용한 업무가 가능하니 이동 중이란 핑계조차 댈 수 없다. 해외에 있어도 다르지 않다. 연락하는 사람도 사람이지만 받는 쪽에서도 행여 급한 연락을 못받을까 수시로 들춰본다.

회사에서 근무하는 시간만 쳐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단연 1위인데 이처럼 밤낮도 휴일도 없으니 휴식은 사라진 거나 다름없다. 일이 아니라도 분주하긴 마찬가지다. 스마트폰의 경우 한번 열어본 뒤 인지 기능을 회복하자면 5분이 걸린다는데 한국인은 하루 평균 34회씩 열어본다는 마당이다.

제아무리 좋은 뇌도 정신을 못차릴 판이다. 미국도 비슷한지 경영컨설턴트이자 IT칼럼니스트인 니컬러스 카는 저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인터넷이 현대인의 뇌 구조를 바꾸고 있다고 주장했다. 밀려드는 정보 처리에 바빠 뇌가 창의적 사고 능력을 잃고 있다는 것이다.

뇌도 쉬어야 제대로 돌아간다는 건데 문화인류학자로 인텔의 사용자경험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제네비브 벨 박사 또한 같은 주장을 폈다. '혁신적 아이디어는 지루한 뇌에서 생겨난다'는 게 그것이다. 뇌도 할 일이 없어 지겨워야 뭔가 색다른 걸 궁리해낸다는 논리다.

스트레스는 뇌 속 해마를 위축시키고,해마가 위축되면 학습력과 기억력 모두 떨어진다는 건 알려진 사실이다. 한국인의 일 중독은 대부분 '쉬면 나 아닌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지 모른다'는 데 대한 걱정 탓이라고 한다. 두려움에 떨며 하는 일의 생산성이 높을 리 없다. 막연하게 창의성 운운할 게 아니라 '퇴근 후 휴대폰과 이메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라도 보장해줄 일이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