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토 벽화 속의 '면죄부'…천국행 티켓이 교회 하나 값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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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랑추랑<美廊醜廊> - 정석범의 재미있는 미술이야기 (10)
'악덕의 상징' 고리대금업자, 성화에 당당하게 등장…'유전무죄' 사회상 드러내
'악덕의 상징' 고리대금업자, 성화에 당당하게 등장…'유전무죄' 사회상 드러내
고리대금업자도 천국에 갈 수 있을까. 갈 수 있었다. 적어도 중세 말기에는 그랬다. 르네상스의 기운이 서서히 싹트던 인문주의의 여명기는 돈이면 다 되는 혼탁한 세상이었다. 아무리 나쁜 짓을 많이 했어도 면죄부만 손에 넣으면 누구나 천국에 자신의 안식처를 마련할 수 있었다.
초기 기독교 시대만 해도 죄 지은 자가 속죄하려면 교회법에 따라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517년 에파온 공의회에서 속죄 요건 완화가 결정되면서 참회기도,단식,자선품 헌납은 물론 회개세 납부를 통해서도 속죄할 수 있게 됐다. 이렇게 해서 거둬들인 돈이나 재화는 교회나 병원,학교를 짓는 데 투입돼 긍정적인 기능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물이 고이면 썩기 마련이다. 중세 후기로 넘어가면서 면죄부를 둘러싼 갖가지 부패가 만연하게 된다. 교회의 위임을 받은 면죄부 판매자들이 허용 한도 이상으로 과다 판매했고 성직자들도 신도들에게 비싼 값을 받고 면죄부를 발행했다.
면죄부를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자 1215년 소집된 라테라노 공의회는 교회에 봉헌한 자에 한해서만 1년짜리 면죄부를 부여하고 나머지 선행에 대해서는 40일짜리 면죄부를 준다고 결정했다.
아울러 천국행 티켓은 오로지 이교도를 박멸하는 데 앞장 선 사람에게만 보장하기로 했다. 그러나 공의회의 결정을 비웃듯 즉시 수백 년,수천 년,심지어 수만 년짜리 가짜 면죄부가 나돌았고 여기엔 상당수의 성직자들이 연루됐다.
중세 말의 대표적 화가 조토(1267?~1337)가 스크로베니 교회에 그린 벽화 '최후의 심판'은 면죄부를 둘러싼 당대 교회의 부패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스크로베니 교회는 1305년 파도바의 대부업자인 엔리코 스크로베니가 박애 성모 마리아 교회에 헌납한 것으로 '최후의 심판'은 출입구 쪽 벽에 그려져 있다. 상단에는 심판자 예수를 중심으로 좌우에 제자들이 자리하고 있고 하단 오른쪽에는 천국,그 왼쪽에는 지옥이 각각 배치돼 있다.
주목을 끄는 것은 사자의 영혼의 무게를 재는 저울 왼쪽 장면이다. 무릎을 꿇은 한 남자가 교회 모양의 미니어처를 마리아 막달레나 등 성모를 수행했던 세 명의 마리아에게 바치고 있다. 주인공은 엔리코 스크로베니.그의 아버지는 단테의 '신곡'에 실명으로 등장할 만큼 악명 높은 고리대금업자였다. 그 역시 아버지만큼은 아니었지만 악행으로 축재한 돈을 물려받아 고리대금업을 한 만큼 죗값이 결코 가볍다고 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천국에 가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면죄부를 받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교회를 지은 건 그 때문이었다.
그는 금융업자답게 자신이 정당한 값을 치르고 천국행 티켓을 구매했음을 표시해뒀다. '최후의 심판'에 스크로베니가 등장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일개 세속인이 성화에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은 건 당시로서는 유례없는 무례한 짓이었다.
중세의 가을은 이렇게 '유전무죄,무전유죄'라는 전도된 가치가 판치는 세상이었다. 조토의 벽화에 나타난 고리대금업자의 얼굴을 보라.죄지은 자의 모습이 그 얼마나 당당한가.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 미술사학 박사 sukbumj@hankyung.com
초기 기독교 시대만 해도 죄 지은 자가 속죄하려면 교회법에 따라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517년 에파온 공의회에서 속죄 요건 완화가 결정되면서 참회기도,단식,자선품 헌납은 물론 회개세 납부를 통해서도 속죄할 수 있게 됐다. 이렇게 해서 거둬들인 돈이나 재화는 교회나 병원,학교를 짓는 데 투입돼 긍정적인 기능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물이 고이면 썩기 마련이다. 중세 후기로 넘어가면서 면죄부를 둘러싼 갖가지 부패가 만연하게 된다. 교회의 위임을 받은 면죄부 판매자들이 허용 한도 이상으로 과다 판매했고 성직자들도 신도들에게 비싼 값을 받고 면죄부를 발행했다.
면죄부를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자 1215년 소집된 라테라노 공의회는 교회에 봉헌한 자에 한해서만 1년짜리 면죄부를 부여하고 나머지 선행에 대해서는 40일짜리 면죄부를 준다고 결정했다.
아울러 천국행 티켓은 오로지 이교도를 박멸하는 데 앞장 선 사람에게만 보장하기로 했다. 그러나 공의회의 결정을 비웃듯 즉시 수백 년,수천 년,심지어 수만 년짜리 가짜 면죄부가 나돌았고 여기엔 상당수의 성직자들이 연루됐다.
중세 말의 대표적 화가 조토(1267?~1337)가 스크로베니 교회에 그린 벽화 '최후의 심판'은 면죄부를 둘러싼 당대 교회의 부패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스크로베니 교회는 1305년 파도바의 대부업자인 엔리코 스크로베니가 박애 성모 마리아 교회에 헌납한 것으로 '최후의 심판'은 출입구 쪽 벽에 그려져 있다. 상단에는 심판자 예수를 중심으로 좌우에 제자들이 자리하고 있고 하단 오른쪽에는 천국,그 왼쪽에는 지옥이 각각 배치돼 있다.
주목을 끄는 것은 사자의 영혼의 무게를 재는 저울 왼쪽 장면이다. 무릎을 꿇은 한 남자가 교회 모양의 미니어처를 마리아 막달레나 등 성모를 수행했던 세 명의 마리아에게 바치고 있다. 주인공은 엔리코 스크로베니.그의 아버지는 단테의 '신곡'에 실명으로 등장할 만큼 악명 높은 고리대금업자였다. 그 역시 아버지만큼은 아니었지만 악행으로 축재한 돈을 물려받아 고리대금업을 한 만큼 죗값이 결코 가볍다고 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천국에 가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면죄부를 받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교회를 지은 건 그 때문이었다.
그는 금융업자답게 자신이 정당한 값을 치르고 천국행 티켓을 구매했음을 표시해뒀다. '최후의 심판'에 스크로베니가 등장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일개 세속인이 성화에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은 건 당시로서는 유례없는 무례한 짓이었다.
중세의 가을은 이렇게 '유전무죄,무전유죄'라는 전도된 가치가 판치는 세상이었다. 조토의 벽화에 나타난 고리대금업자의 얼굴을 보라.죄지은 자의 모습이 그 얼마나 당당한가.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 미술사학 박사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