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3만4000달러의 빚이 있습니다. 학자금대출을 받았고 주택담보대출로 집을 샀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정보기술(IT) 회사에서 일하다 지난 여름 해고됐습니다. 다행히 파트타임 일자리를 구했지만 근무시간은 늘고 월급은 줄었습니다. 그나마 이 일자리마저 잃을까 걱정입니다. "

◆일자리가 없다

지난 8일(현지시간) 뉴욕 맨해튼 워싱턴스퀘어 공원.수천명의 군중과 함께 "월스트리트를 점령하자(Occupy Wall Street)"는 구호를 외치던 26세의 밥 레이즈는 "잘못한 것 없이 열심히 살았는데 변변한 직장도 없이 빚더미에 앉은 상황이 지긋지긋해 월가 점령 시위에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은 힘들게 사는데 경제를 망친 월스트리트 사람들은 여전히 수십만달러를 보너스로 받아 가는 건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게 아니냐"고 되물었다.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는 월가 점령 시위는 특별한 주장이나 요구사항이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월가를 점령하자'는 시위의 명칭부터 추상적이다. 정권 교체를 바라는 것도,자유무역협정(FTA) 폐지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생계비조차 막막한 현실에 좌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낸시 펠로시 민주당 하원의장은 "가족을 부양할 수 없고 미래를 알 수 없는 것만큼 당신을 화나게 하는 일은 없다"며 "그들이 화가 난 건 일자리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금융에 의존했던 경제성장

'재능과 열정만 있으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이 저성장의 늪에 빠져 악몽으로 변해가고 있다. 지난 2분기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연율(전 분기 대비 증가율을 연간상승률로 환산해 계산한 수치) 기준으로 1.3%.1분기의 0.4%에 비해서는 다소 높아졌지만 9.1%에 달하는 실업률을 낮추기에는 턱없이 낮은 성장률이다.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한 2008년부터 2009년 3분기까지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하던 미국은 정부의 경기부양으로 2009년 4분기부터 3~4%대로 성장률을 반짝 끌어올렸다. 하지만 올해 들어 성장률은 다시 곤두박질쳤다. 경제의 펀더멘털이 훼손된 상태에서 정부의 인위적인 경기부양책은 말라붙은 사막에 물을 붓는 것과 같았다.

미국의 경제성장률이 낮아지고 실업률이 높아진 건 금융위기가 발생한 2007년 이후부터지만 사실 이는 2000년대 초반부터 예견됐던 일이다. 2001년 '닷컴 버블' 붕괴 이후 미국에는 이렇다 할 성장전략이 없었다. 금융위기가 터지기 전까지 유일하게 경제를 지탱해온 건 부채였다. 빌린 돈으로 소비를 했고 부동산에 투자해 자산 가격을 밀어올렸다. 조만간 시카고대 강단으로 돌아가는 오스턴 굴즈비 백악관 경제자문위원장은 최근 "부채에 의존한 소비 지출과 부동산 버블이 이끌어온 지난 10년간의 국가 비즈니스 모델로는 절대 돌아가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들의 투자와 수출 증대,혁신을 통해서만 제대로 된 경기회복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생산직 · 사무직 경시한 성장의 실패

굴즈비 위원장의 발언은 어느 업종보다 고용 창출 효과가 큰 제조업을 경시해온 지난 10년간의 정책 실패와 무관치 않다. 2000년부터 2007년까지 미국의 제조업 일자리는 320만개 줄었다. 기업들이 인건비가 저렴한 중국 등 해외로 아웃소싱을 늘리고 투자를 집중하면서다.

미국의 산업구조가 금융업 중심으로 변하면서 생산직과 사무직 일자리가 급감했지만 미국은 실직자들을 재교육하고 첨단인력으로 키우는 데 게을렀다. 최근 미국 노동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320만개의 일자리가 기업이 원하는 인력과 구직자들이 보유한 기술 사이의 '미스매치' 때문에 채워지지 않고 있다. 전체 실업 인구의 약 25%가 이 같은 고용 미스매치에 기인한다는 분석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의 경제담당 논설위원인 데이비드 위셀은 "월가에서 받는 엄청난 연봉이 아니었다면 과학 소프트웨어 공학 등 의미 있는 직종에서 활약했을 고급 두뇌들이 미국 경제에 냉전시대 공산주의 국가들이 가했던 것보다 더 큰 해를 입혔다"고 말했다. 위셀 위원은 "미국이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분야에 인재와 자본이 흘러들어가도록 성장전략을 짜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뉴욕=유창재 특파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