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구두, 이건희 회장 정도 돼야 신나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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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구두브랜드 벨루티(Berulti)의 매니저는 곤란한 목소리로 기자의 방문을 사양했다. '영혼을 지닌 구두'로 불리며 유럽 왕족과 상류사회의 남자들만 신는다는 프랑스 브랜드가 벨루티다.
이탈리아 수석 장인이 고객의 주문을 직접 받기 위해 한국에 온다는 소식에 지난달 19일 서울 청담동 본사로 한 걸음에 달려갔다. 1년에 한 번 방문한다는 점도 흥미로웠지만 대체 누가 어떤 구두를 주문 하나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결국 돌아온 대답은 '알려드릴 수 없다'였다. 그렇지만 핑계삼아 방문한 청담동 매장은 역사를 짐작할 수 있는 구두들이 제 멋을 뽐내고 있었다. 마치 '내가 구두다'라고 말하는 듯한 기품이 흘렀다.
그도 그럴 것이 벨루티는 1895년 설립돼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는 수제화 브랜드다. 알렉산드로 벨루티를 시작으로 4대를 이어오고 있다. 1993년 프랑스 LVMH 그룹에 인수됐지만 전통적인 신발 제작기법을 고수하고 있다. 대표적인 전통기법은 베네치아산 가죽을 갯벌 속에서 숙성시킨 후 제작한다는 점이다.
매장 전체에는 명품으로서의 고급스러움이 퍼져 있었다. 외부는 나무로 된 창들과 문이 눈에 띄었다. 창가에는 구두와 가방들이 놓여져 있었다. 유럽 마을의 빈티지 가게를 보는 듯했다. 내부에 들어서자 가죽냄새가 온 몸을 감쌌다. 가게의 내부 벽과 기둥은 온통 가죽으로 장식돼 있었다.
드문드문 놓여진 소파와 자리는 편안함을 줬다. 손님 몇 명이 자리에 앉아 구두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컬러를 바꾸려는 주문부터 이것저것 신어보는 손님도 있었다. 매장에 직접 와서 고르는 구두의 가격은 200만~350만원대다. 하지만 장인이 직접와서 맞춰주는 최고 등급인 비스포크(Bespoke) 슈즈는 1000만원을 호가한다.
고객의 발 치수와 볼륨을 측정하고 특징을 정확히 기록하는 것은 물론, 가죽의 종류, 컬러, 아웃솔 공법 등을 고객이 직접 정한다. 발본, 패턴, 제갑 등 6단계에 걸쳐 제작된다. 각 단계의 최고 장인들이 250여번의 수작업을 통해 완성된다.
구두가 완성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약 5개월이다. 이번에 주문한 4명의 고객은 내년 2월은 되야 구두를 받아볼 수 있다는 얘기다. 과거에는 주문 후 1년 이상의 기간이 걸렸지만, 지난해부터 시간을 단축해 만들고 있다고 한다. 구두에 문신을 새기거나 컬러, 가죽 등 모든 신발 사양을 마음대로 고를 수 있다. 구두 한 켤레의 가격은 800만~1000만원이 보통이다.
대체 이런 구두는 누가 신을까? 매장을 둘러보며 "이렇게 좋은 구두는 정말 이건희 회장 정도는 돼야 신을 수 있는 거 아니예요?"라는 기자의 농담섞인 질문에 돌아온 매니저의 대답은 '네'였다.
매니저에 따르면 벨루티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애용하는 신발이다. 최근 단골로는 배우 배용준이 꼽혔다. 배용준의 경우 본인이 신는 것은 물론 지인들에게도 벨루티 신발을 선물해준다고. 다만 청담 본점이 아닌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 매장에서 직접 신발을 고른다고 했다. 이웅렬 코오롱그룹 회장 또한 벨루티 매니아다.
유독 낯익은 신발이 보였다. SBS 드라마 '시크릿가든'에서 재벌 역할로 출연한 현빈이 신었던 구두였다. 비록 협찬으로 제공했다고는 하지만, 드라마 대사처럼 이탈리아 장인이 '한땀 한땀' 만든 구두를 정말 신은 셈이었다. 공정마다 역사가 있고 정성을 들인만큼 이름도 붙어있다. 염색작업은 '파티나(Patina) 기법'이라고 하고 매듭이름도 '벨루티 매듭(Berluti not)'이다.
일반적인 염색기법은 가죽 위에 염료를 사용해 기존 컬러를 덮어버린곤 한다. 하지만 벨루티의 파티나 기법은 특수한 태닝(tanning)을 거쳐 가죽 본연의 컬러를 바꾸는 작업을 거친다. 4시간에 거친 작업으로 색깔이 입혀진다. 마치 붓으로 그린 듯한 색감으로 옻칠의 느낌이 났다. 고객의 요청이 있으면 색깔의 변경도 가능하다고 한다.
벨루티 매듭은 유럽의 전통에서 유래됐다. 유럽의 왕이나 귀족들은 대중 앞에서 결코 고개를 숙이거나 몸을 굽히지 않았다. 따라서 구두의 매듭은 쉽게 풀리지 않는 것이 필수였다. 이러한 조건을 맞추기 위해 벨루티 매듭은 매는 데에만 12번의 과정을 거쳐 묶여진다.
이렇게 '전통'과 '역사'로만 대변되는 벨루티가 10월에 신상품을 준비하고 있다. 디메져 클래식(Demesure Classic)으로 전통적인 디자인과 세련된 디테일을 가미했다. '버클 더비', '태슬 로퍼', '원 아이렛 더비' 등 세가지 스타일이 출시한다.
벨루티는 내년에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대적인 콘셉트와 의류까지 선보일 예정이다. 그럼에도 매장의 수는 늘리지 않을 예정이다. 한국에서도 두 개의 매장을 당분간은 고수할 방침이다. 디자인 콘셉트는 달라지지만 전통적인 기법은 지키면서 고객들이 먼저 찾는 브랜드로서의 명성은 지켜간다는 얘기다.
김가빈 코오롱F&C 벨루티 마케팅 매니저 또한 벨루티의 변화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벨루티는 그동안 장인 위주의 광고와 콘셉트를 유지했지만, 올해를 기점으로 내년부터는 LVMH의 루이비통과 같이 현대적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라며 "지난 7월 새로운 디자이너들이 영입돼 새로운 감각을 더한 제품들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경닷컴 김하나 기자 han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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